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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유원 시인 / 대가리가 없는 작은 못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8.

황유원 시인 / 대가리가 없는 작은 못

 

 

대가리가 없는 작은 못이여

망치로 두들기면 납작한 대가리 대신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작은 못이여

휘어지는 못이여

이리 튕기고 저리 튕기며 불꽃 튀기는 못이여

그러나 결국 안으로 들어가

휘어진 몸을 기어이 숨기고

벽 전체를 침낭으로 삼고 잠들 작은 못이여

겁대가리 없는 작은 못이여

작지만 작지 않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 적의 내장에 박히면

내출혈을 일으킬 자랑스러운 못이여

삼켜지면 툭 뱉어지고 말

당최 맛대가리라곤 없는 못이여

대가리가 없는

대가리가 없어 딱히 생각이 없는

생각이 없으므로 쓸데없는 생각도 없는

쓸데없지만은 않은 못이여

없는 생각의 불꽃을 튀기며

무데뽀(無鐵砲)로 끝까지 밀고 들어가는 작은 못이여

없는 대가리로

열리지 않는 가슴에 쿵쿵 두드려지는 못이여

때로 대가리란 없느니만 못하니

대가리가 없어 쉽게 빼낼 수도 없는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잊혀

이제는 온 존재가 사라지고 만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게 돼버린 못이여

대가리를 다느니

그냥 벽 안에 묻혀 고요히 죽고 말

세상 겁대가리 없는 작은 못이여

 

 


 

 

황유원 시인 / 공룡 인형

 

 

마당은 공룡 인형들로 무너질 듯 하다

한때 지구의 주인이었던 것들이

이제 작은 고무 인형이 된 채 마당을 걸어다니다 이렇게 문득

정지해 있는 것이다

누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

더 이상 잡아먹지도

으르렁거리지도 못하고

마당에 늘어져 있는 공룡들

가끔 누가 와서 가지고 논다

그들에게 목소리와 동작을 부여하는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가 음성

공룡의 상상력에 대해서라면 생각해본 적 없지만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작고 말랑말랑한 고무 인형이 되어

아이의 몸 빌어 움직이게 될 날이 올 줄은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까

마당에 저녁이 오고

지겨워진 아이가 공룡들 내팽개친 채 자릴 떠나면

그들은 쓰러진 채 고용하고

다시 일어설 줄 모른다

같은 어둠이지만

한때는 이불처럼 덮고 자던 어둠이

이제는 모든 움직임을 잃은 인형들을 덮어주기 위해 천천히

마당 위로 깔릴 때

아이는 조금 늙어 있고

바람 한 번 불자

중생대부터 있어 온 은행나무 앞 마당에 떨어진다

은행나무는 자신이 은행나무 인형이 되는 꼴을 보게 될 날은

아마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하고

마당은 이 온갖 것들로 인해 잠시

폐허가 되어 흘러갔고

오래전이라고도

오랜 후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포지션 15년 여름호>

 

 


 

 

황유원 시인 / 비 맞는 운동장

 

 

비 젖은 운동장을 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방울의 비도 피 할 수 없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빗줄기 하나 피할 데 없이

누구도 달리지 않아 혼자 비 맞는 운동장

어쩌면 운동장은 자발적으로 비 맞고 있다

아주 비에 환장을 한 것처럼

혼자서만 비를 다 맞으려는 저 사지의 펼쳐짐

머리끝까지 난 화를 식히기 위해서라면

운동장 전체에 내리는 비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벌서는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벤치에 앉은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아예 하늘 보고 드러누운 사람이 되어 비를 맞다가

바닥을 향해 엎드려뻗쳐 한 사람이 되어 비를 맞아 버린다

혼자 비 맞고 있는 운동장, 누가 그쪽으로

우산을 든 채 걸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작은

구멍 같아 보이는 사람이 벌써 몇 바퀴째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비 맞으며 뛰놀진 않는 운동장

웅덩이 위로 빗방울만 뛰노는 운동장에서

어쩌면 그건 그냥 운동장의 가슴에 난 구멍이

빗물에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공중을 달려온 비들이

골인 지점을 통과한 주자들처럼 모두

함께 운동장 위로 엎질러지는 동안

고여서 잠시, 한 뭉텅이로 휴식하는 동안

우산은 분명

운동하고 있었다

혼자서 공 차고 노는 사람이

혼자서 차고

혼자서 받으러 가듯

비바람에 고개 숙이며 간신히 거꾸로

뒤집어지지 않는 운동이었다

상하 좌우로 쏟아지는 여름의 십자포화를 견디며

마치 자기가 배수구라도 되겠다는 양

그 구멍 속으로 이 시의 제목까지 다 빨려 들어가 버려

종이 위엔 작은 구멍 하나만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자신을 소멸시키겠다는 듯이

가까스로 만들어낸 비좁은 내부 속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소릴

집중시키고 있었다

 

 


 

황유원 시인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