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 시인 / 접시꽃
아침 햇살에 한 뼘 지나는 눈길에 또 한 뼘 자란 키 담을 넘는다
예쁘다
이 한 마디에 껑충 뛰어오른 꽃대 꽃망울이 까치발 딛고 연지 바르면
꽃그늘에 선 유월 비단 같은 설렘 주렁주렁 목에 걸었다
김미옥 시인 / 시를 쓰는 딱따구리
빨간 머리 딱따구리가 전두엽 골짜기에서 신호를 보낸다 내가 아직 매력적이야? 따다닥 저것 좀 봐 코르셋을 얼마나 조였는지 젖가슴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왕년의 배우 모니카는 본차이나 같네 딱따구리가 잠 못 들면 오늘은 날 샌 거지 온몸으로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 피가 몰렸다가 한꺼번에 터졌다거나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데 쌍무지개 눈앞에 어른댔다거나 하는 고전적 표현의 오르가슴 말이야 아까부터 모니카가 자꾸 날 자극 하네 은밀하게 코를 깎아 나라를 새로 세우든지 늘어진 지방 덩어리를 빨아들여 지루하고 단조로운 세상을 전복시키든지 하라고 불순물 뱉어내듯 가벼운 너의 노래를 클릭해줄 게 따다닥 나는 왜 바쁠 때만 노래를 부르고 싶어지는 걸까 야금야금 훔쳐 먹는 별미 늙어가는 여배우를 보는 것처럼 유행 지난 파반느를 추는 것처럼 알배기 연어가 죽을 힘 다해 하천으로 돌아오면 미모는 다시 돌아올까 따다닥 딱따구리가 잠들기 전에 쇼핑하듯 맞춤형 노래 한 곡 지어볼까 딱따구리가 영원히 잠들기 전에
김미옥 시인 / 성인 발레반
발레반 F조의 뚱뚱한 발레리나는 바닥이 닳은 분홍 신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토슈즈가 아니다 발끝으로 서기엔 그녀는 습기가 많다 몸에 물기가 많다는 건 주저앉기 쉽다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건 봉을 잡고 서 있는 일 다섯 가지 기본 동작을 배우는 일이다 쉭쉭 기분 나쁜 숨소리 내며 튀튀*를 입는다 너희가 뚱뚱한 시시포스의 비애를 아느냐 삶은 계란 같이 팍팍함을 아느냐 검은 타이츠를 입은 발레리나들 몰려나온다
누가 먼저 토슈즈를 신나 자맥질하는 물오리 같은 엉덩이 오늘도 아라베스크는 위태롭다 발끝으로 서면 무엇이 보이니 마음이 도도하면 몸도 도도해지나 열망만 주고 몸은 주지 않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밤새 물기를 흡입한 스펀지 같은 나를 꽉 짜주세요 결마다 젖어 있는 수치심을 깨워 무거운 살의 바퀴를 다시 굴린다
에싸뻬, 꾸뻬* 배에 힘주세요 턱을 들고 등은 곧게 성인 발레반 F조 ‘비만클래스’
* 튀튀 : 발레리나들이 입는 스커트 * 에싸베, 꾸뻬 : 발레 기본 발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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