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참 시인 / 거미와 나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내가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동안 배고픈 거미는 내 발톱을 갉아먹고 조금씩 살이 오른다. 내가 낮잠을 자면 거미도 내 귓속에서 낮잠을 자고 내가 노란 꽃 활짝 핀 해변을 거닐면 거미도 내 귓속에 누워 꿈을 꾼다. 어두운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거미는 줄을 타고 내려와 내 발가락을 갉아먹는다. 봄이 와서 마당 가득 분홍빛 모란이 피면 거미는 집 곳곳에 투명한 집을 짓는다. 벌레들의 무덤을 만든다.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초승달 뜬 하늘에 하얀 별 총총 박힌 어둡고 깊은 밤 거미는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내 귓속에 하얀 알을 낳는다. 여름이면 새로 태어난 거미들이 집 곳곳을 기어 다닌다. 귀가 넷 달린 수백 마리 회색 거미들. 내 살을 파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를 작은 거미들. 장마가 지나가면 거미들은 투명한 줄을 타고 논다. 습하고 무더운 날이 계속된다. 거미는 내 살을 갉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빨랫줄에 걸린 생선처럼 조금씩 야위어 간다.
계간 『시산맥』 2021년 가을호 발표
김참 시인 / 은행나무숲으로 가는 기린
창밖에 기린이 나타나 귀 쫑긋 세우고 내가 틀어놓은 음악을 듣는다. 저녁마다 커다란 기린이 나타나 안테나처럼 귀를 세우고 내가 틀어놓은 옛날 음악을 듣는다. 나는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기린에게 건네준다. 기린은 사과를 꿀꺽 삼키며 크고 순한 눈을 깜빡거린다. 나는 사과 하나를 더 건네주며 사과 씹는 기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린 머리에 달린 딱딱한 뿔을 올려다본다. 그때마다 내 심장은 쿵쾅쿵쾅 뛴다. 바람이 분다. 기린은 몸을 돌려 은행나무숲으로 돌아간다. 숲으로 가는 길엔 작고 낮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기린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집들의 심장에 주황색 등불이 켜지고 커다란 발자국이 숲으로 이어진 길 위에 뚜렷이 새겨진다. 숲과 집들과 나무들과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들 점점 작아지고 기린의 몸집은 점점 커진다. 회색 구름이 기린의 목에 걸린다. 남자와 여자가 잠든 작은 방 창문 밖으로 기린이 지나간다. 은행나무 잎 녹색 빛깔 점점 짙어지는 여름밤, 은행나무숲에 앉아 있는 연인의 등 뒤로 기린이 지나간다. 아니, 기린 지나가는 소리 들린다. 조용히 비가 내린다. 은행잎들이 가만히 떨어져 내린다.
계간 『시산맥』 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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