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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다연 시인 / 포도 밭에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0.

정다연 시인 / 포도 밭에서

 

 

빈들에

마른 풀잎이 울고 있다

포도 밭둑을 안고 달리던 열차

하늘의 푸름 뚝 꺾어

회색 무덤으로 질주 했다

 

얇은 햇살 내려앉은

따뜻한 삼월

초라한 간이역에서

잿빛 문 열고

마지막 승차 하신 손님

달 갈이 여러 해 지나

낮달 되어 중천에 떠 있고

 

농운이 휘어드는 오후

아늑한 하늘가

흑진주 잉태한

하얀 나무줄기 입술위로

봄비가 내리고 있다

그의 슬픈 눈물이 흐르고 있다

 

 


 

 

정다연 시인 / 억새꽃

 

 

낯설지 않는 언덕

맑은 하늘에 안긴 항구

빚어 올린  은백의 머리위

붉게 태우는

생의 허물 한점

 

가슴을 찢어

슬픈날을 비워내고 있다

 

하얀 울음

벼랑끝

바다로 쏟아지고

떠나야하는 먼 약속인지

몸은 온통

타오르는 불꽃

 

여무는 햇살을 지나

자라나는 세월을 지나

허기진 나그네들의

지친 발걸음

해를 따라 넘어가고 있다

 

 


 

 

정다연 시인 / 포도밭에서 2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우암 선생의 헛기침 소리에

생가의 봄날은 첫물이 오르는데

흑진주 장식하시던 어머니

가진 것 다 비우시고

묵묵히 바람 언덕에 누웠다

 

거칠었던 청춘

툭툭 썩은 풀 더미

헤치고 나와

비통한 넋두리 늘여 놓고

건너

잿빛 낡은 집

가죽나무 그림자에 눌려

힘없이 주저앉고 있다

 

굽어진 허리로

바쁘게 달리던 논둑길엔

다닥다닥 피던 질경이

금방 뛰쳐나올 여유도 생겼는데

마주칠 수 없는 운명은

하얀 봄꽃으로 피어

환하게 포도밭을 휘 덮을 것이다

 

 


 

정다연 시인

1963년 경북 영일 출생. 경주 문예대학교 졸업. 2005년 해양문학 전국대전 전체장원. 201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