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시인 / 가을 달밤
깊어가는 가을밤, 환한 달빛 아래 샐비어들이 시들고 마른 풀들이 눕는다
하루치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다 말고 오래된 회화나무 등걸에 우두커니 등을 기대어 선다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뿌리로 힘주는 나무들을 자꾸만 흔들어댄다 달빛을 그러안는 듯, 가지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단풍나무 붉은 잎들
무슨 풀벌레들인지, 서늘한 바람 소리와 달빛의 각단에 울음소리를 끼얹고, 쟁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얼씬대지 않는다 달빛 속의 집들도 불을 다 꺼버렸다
이태수, 『침묵의 결』, 문학과지성사, 2014, 62~63쪽
이태수 시인 / 오래된 귀목나무
오랜 세월 동안 말들을 침묵 속에 다져온 것일까 마을 어귀의 저 귀목나무는, 잎사귀들은 마치 그런 말에서 돋아난 침묵의 결과 그 무늬들 같다 신성한 말들만 파랑 치고 있다. 아주 오래된 저 귀목나무는 까마득히 오래된 침묵의 한가운데서 느리게 솟아오른 광휘 같다. 오로지 말 없는 말에만 귀 열어 깊이깊이 안으로만 쟁이고 되새김질해 그윽한 빛을 뿜어내는 것 같다 그 그늘에 낮게 깃들인 나는 작아지고 작아지기만 하는, 끝내 허물도 벗지 못하는 애벌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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