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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수현 시인 / 어느 고전적 슬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0.

박수현 시인 / 어느 고전적 슬픔

 

 

딱딱하게 마른 슬픔을 본 적이 있다

에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 계단을 내려서면

각기 다른 양식의 석주(石柱) 사이

당신은 눈물의 푸른 기둥을 만나게 된다

벨그라드 초원에서 끌어온 물길을 가둔

이 고고학적 슬픔 앞에서 만약,

입꼬리를 올려 셀카를 찍었다면

이미 당신은 메두사의 슬픔에 전이되었다는 말

페르세우스의 검을 받고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치명적 머리카락을 날리는 그녀

맹독(猛毒)의 사랑에 사지가 굳어가는 동안

속수무책, 연인들은 죽음에 파 먹히며 캄캄해졌다

참수(斬首)된 목덜미엔 달빛 같은 허기들이 희붐한데

그녀의 없는 젖가슴과 가랑이에 봄빛이 들었다

아직 무너진 어느 신전 기둥 아래 나뒹굴고 있을까

나는 어떤 울음들이 새겨진

고백의 연대기를 채록(採錄)해 본다

너에게 끝내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던

나의 글썽임은

이오니아식인가 혹은 코린트식 슬픔일까

 

살 부러져 망가진 우산을

혓바닥 날름대는 석주 옆에 세워두고

쫓기듯 지하 궁전을 벗어났다

블루모스크를 건너온 빗줄기가 차다

 

*532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때 7천여 명의 노예가 동원된 지하 물저장소. 135*65cm, 높이 9m의 장방형 이 저장소에는 각기 다른 문양과 양식의 기둥 336개가 있다. 전국의 신전에 버려진 기둥을 운반해 건설했기 때문이라는데 이 중 머리 하나는 옆으로, 또 하나는 뒤집힌 메두사 문양 석주와 눈물의 석주가 유명하다.

 

 


 

 

박수현 시인 / 박태기 꽃

 

 

 복개천 골목시장 입구, 전철 길보다 낮게 웅크린 집 마당에 박태기나무 한 그루가 봄비에 젖고 있다 나는 철거 날짜 어른대는 전봇대를 반쯤 열린 대문 옆에 세워놓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진자홍 밥풀을 따 다담다담 밥을 짓다 손톱으로 목덜미를 긁어대던 가시내가 있다

 

 철거반원들이 해머로 벽을 치자

 꽃대 없는 꽃들이 더 붉게 앓아 떨어지던 집

 대문 한 짝이 떼어지자

 사과 궤짝 안 토끼 두 마리가 바닥을 긁어대던 집

 내동댕이쳐진 그림일기장 속

 바둑이가 낑낑대며 마당으로 달려 나오던 집

 채 묶지 못한 이불 보퉁이에 매달린

 수수밥 풀떼기 같은 가시내들 울음소리

 꼭꼭 씹으면 입맛만 다시던 집

 속엣것 쏟아내면서 외마디 비명도 없이

 맥없이 주저앉던 그 집

 

 박태기 꽃잎들이 후두둑 비속에 지고 있다 얼룩얼룩 노란 철거 날짜가 젖은 봄을 긁어댄다 우산 너머 산복도로 쪽으로 마을버스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기어오른다 비에 젖어 더 또렷한 꽃잎처럼 기억은 우산만한 가려움을 펼쳐든다 나는 장바구니를 흔들며 ATM 출납기 부스로 들어선다

 

 


 

 

박수현 시인 / 복사뼈를 만지다

 

 

난데없이 부어 오른 왼쪽 발목의 복숭씨가

 

복숭아처럼 발그레 익었다

의사는 벌써 몇 번째 주사기로 물을 빼낸다

복숭아, 나직히 중얼거리기만 해도

분홍빛에 오금 저려 덜컥 물러지던

솜털 보송보송한 때를 기억하고 싶어

사람들은 복사뼈를 복숭씨라 부르는 것일까

 

모자라거나 넘친 마음들은 가지를 떠나는 걸까

비온 뒤 단맛 빠진 낙과를 광주리에 주워 담던

여자의 물크러진 한나절에는

쪼글쪼글 벌레들이 하얗게 오글거렸다

그런 밤이면 원두막 시렁에 얹힌 달빛도

연분홍, 진분홍으로 짓물러졌다

 

과육 반점이 부풀어 오른다

꿈틀대는 씨앗을 쪼개 벌레를 끄집어낸다

꺼이꺼이 발목께에서 펌프질하는 복숭씨여

한 바가지 마중물이 퍼 올린 복숭앗빛에

여자는 두 발을 이리저리 포갠다

 

 


 

 

박수현 시인 / 어두워지는 연못

 

 

이사를 앞두고 부부용 베개를 버린다

흰 속청은 얼룩지고

메밀 알갱이는 푸슬푸슬 부서지는데

베갯모 속 원앙 한 쌍은 여전히 흔들리는 물결 위에 떠 있다

베갯모 테두리 예서체 청홍 목숨 수(壽)자가

유록빛 수면 위에서 정갈한 이음수의 단잠을 허무는 동안

자줏빛 날개를 펼친 수컷과 다소곳한 암컷의 어깨가

당초구름문 밴 물풀 사이 반쯤 접혀져 있다

함께 살 셋방 얻느라 미리 당겨 쓴 계금을

꼬박꼬박 부어 나가야 하듯

일생 상대에게 붓는 사랑도 이와 같은 것이라면

저 연못으로 한 땀 한 땀 호는 햇살과

장대비와 석 달 열흘 가뭄을 마다할 수 있었으랴

늦은 오후, 수면에서 굴절되는 햇살이

서로를 참아내느라 자글대는 눈가를

간신히 매듭수로 꿰매며

소금쟁이처럼 물결 위를 미끄러져 간다

 

 


 

 

박수현 시인 / 銀星 갤러리

 

 

강 노인은 훔친 의치를 물컵에 모았다

최 노인은 변기 앞에 쭈그려 앉아 빨래한다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었다

심 노인은 패드 넣은 비닐봉지를 페니스에 묶은 채 복도를 서성였다

서 노인은 씹던 껌과 식은 밥 뭉친 경단을

다른 이에게 먹이려다가 자칭 보안관 김 노인에게 쥐어 박혔다

박 노인은 늘어진 노랫가락을 웅얼대며 현관문에 기대고 있었다

 

저녁 8시, 요양보호사 미나 씨가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두 알의 수면제를 먹고

노인들은 저마다 잠으로 빠져들었다

허기진 입들이

당나귀처럼 커지던 귀가 지워졌다

낮 동안 금시계처럼 번쩍거리던 눈길도

벽에 걸린 풍경화처럼 평온해졌다

 

가을, 겨울, 여름이 지나가도

이곳은 언제나 나른한 봄날

노인들 흉곽을 맴돌며

쟁여둔 그 많은 소리 다 삼킨 괘종소리만

혼자 복도를 빠져나와

어느 먼, 먼 은하로 흘러가고 있었다

 

 


 

박수현 시인

1953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운문호 붕어찜』과 『복사뼈를 만지다』가 있음. '溫詩' 동인. 《시안》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