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희 시인 / 전하지 못한 말
운전기사의 핸들 쥔 손에 몸도 마음도 맡기고 편히 교회 앞까지 오면서 예수님 말씀에 몸도 마음도 맡기고 함께 천국에 가자고 말하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마디 말로는 부족한 듯해서 자투리 동전을 사양하고 대낮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리지만 마음은 못한 말 때문에 안개 낀 밤처럼 아련합니다.
제5회 오장환신인문학상 당선작 박순희 시인 / 역류하는 소문
봄밤은 무리 지어 피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리는 많은 말발굽들이 있고 나는 그중에 한 개를 뽑아 구두에 매달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낮이 지나갑니다. 낮 동안 소리 없는 말들은 엄지에서 태어나고 죽어갑니다.
천리를 간다는 말엔 흥겨운 안장이 있습니다.
난 무엇인가를 부르다 깨어나기도 하는데 간혹 후생이나 전생의 처지를 몸 안에서 겪는다는 생각입니다. 낮게 젖은 꿈이 발굽을 타고 땅속으로 스며드는 아침, 밤새 돌아다녔던 몸이 말합니다. 어제는 낮선 심장을 만나 아프지 않게 울었습니다. 소문은 무리지어 달리는 생물입니다. 문 안의 일이나 문 밖의 일이란 당신이 던진 말밥굽 하나가 단초입니다. 사람들의 말로 지쳐가는 귀는 워워 말을 쓰다듬는 것이 해답입니다.
나는 역류하는 존재가 아니라서 심심한 하루를 보냅니다. 매일 넘치지 않기 위해서 쪼그려 앉습니다. 이야기는 안경을 벗어야 볼 수 있습니다. 부질없이 부푼 것 중 하나가 여벌이어서 입술이 부르틉니다.
봄밤에 나는 말발굽들을 뽑아 버립니다. 주인 없는 말발굽들이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습니다.
『실천문학』 (2016년 겨울호)
박순희 시인 / 내원
어느 날은 한의원 그 느릿한 효과를 떠올릴 때가 있다
자꾸 잠깨는 잠을 구슬려 한의원에 간다. 머리카락마다 졸음이 엉켜 있어 진맥 속에서도 까무룩 잠이 들 때가 있다.
경망스러운 말 같지만 늙는다는 것은 많이 넣고 있다는 뜻이다. 토요일 한의원에는 줄줄 새어나오는 소리가 많다. 지난 봄 고사한 반쪽을 끌고 이 봄에 살려보겠다고 외짝의 봄이 내원하셨다.
안쪽이 닳은 신발을 꼼꼼히 살피는 의원은 가늘고 긴 봄비를 꽂는다.
나는 가끔 구부려지지 않는 생각에 발걸음이 걸려 넘어진다고 자꾸 잠깨는 잠을 옮겨 모종하고 싶다고 말한다.
매일 보는 얼굴과 매주 보는 얼굴은 침 맞는 깊이가 다르다.
열 개의 침상에서 고를 수 있는 신음소리는 제각각이다. 침 맞는 부위마다 꽃들이 환히 피었다 지곤 했는데 꽃이 질 때마다 웅크린 것들이 곳곳에서 풀어졌다.
상처가 클수록 흔적은 마디가 된다. 안쪽 깊숙이 가면 마디로 가득한 방이 나왔다.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은 가장 중요한 처방이었다.
뾰족한 효능을 맹신하지 않기로 한다. 초여름이 느릿느릿 봄을 내원하고 있다.
박순희 시인 / 와온
일몰의 시간으로 아름다운 와온 어쩌자고 일몰의 시간으로 어둑하게 도착했다 규정 속도를 넘어선 길도 빠르게 사라지던 이정표도 이곳 와온에 와서 일몰로 지고 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생의 신호등이 있는 지금은 신호등에 걸린 일몰이 깜박거리는 때
바깥의 시간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와 어둑해지는 물과 하늘이 맞닿아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는 곳 마음에도 금을 그을 수 있을 것 같던 한 때가 눈을 감듯 어두워지고 있다 그러나 괴로웠던 시간들은 다 감은 눈 속에 있어 다급한 바뀌는 신호등처럼 노을이 진다
달의 기억으로 불러들였던 시간들은 출렁거리는 소리를 냈었다 지금은 간조의 시간 물이 빠진 갯벌 곳곳에 발 빼지 못한 흔적들이 깊다
일몰의 짧은 순간을 기억하려 달려 온 길 물은 처음인 듯 붉은 빛을 내고 있다 늘 마지막에서야 빠져나가는 빛은 저렇듯 붉었다 캄캄한 시간이 갯벌 속에서 해캄하고 있다
어둠의 등 뒤로 낮은 곳으로 내려 온 하늘이 산란하는 별들이 소리도 없다 누군가의 별이 되고 싶다면 먼저 어두워 질 것 그보다 먼저 일몰에 다다를 것.
ㅡ「시인정신」201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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