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근 시인 / 투명한 집착-와이퍼
이른 재력 출근길 차창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빗방울 한 몸이 되었다가 흩어지고 간신히 음켜잡은 투명한 집착을 본다
내 안에 무늬 진 숱한 감정을 더듬는다 더는 놔둘 수 없어 한쪽에 접어둔 와이퍼를 켜자 좌우로 날개를 펼치며 맑은 손을 흔든다
최병근 시인 / 실패의 힘
잘 나가다 실패한 형념을 만났다 자네 풍선을 불다 터뜨려본 경험이 있는가
삶도 불다가 터진 풍선 같지 어느 정도 불면 잘 가지고 놀아야 해
최병근 시인 / 갈치
너는 밤바다를 휘젓는 은빛 칼 한 자루다
저 찬란한 쟁의 나날 바다에 한번 누워보지도 못하고 아름다운 칼춤으로 생과 이별하는가
누군가의 코에 꿰이자 반듯한 한 자루 검으로 눕는다
최병근 시인 / 촛불
제 한 몸 기꺼이 태워가는 저 찬연한 불꽃
그늘진 세상에 한줄기 빛을 던지는 무량한 춤사위다
제 몸을 낮추며 떨군 촛농 한 방울 자취 없이 사라진 저 성스러운 해탈
최병근 시인 / 극락
장맛비 추적추적 내리던 날 울타리에 동부콩을 심었다 어머니가 내 나이였을 때쯤 내 젖은 마음 달래주시려 자주 해주시던 밀가루 빵
어느새 내가 그 나이가 되어 동부콩 밀가루 빵을 먹는 날 내가 벗어놓은 신발 속에 긴급히 대피한 청개구리 한 마리 요란하게 염불하고 있다
최병근 시인 / 세탁소 아저씨
옷수선도 잘하는 친절한 세탁소 김씨 얼룩진 옷 하나 둘 헹구고 지우다 숨겨진 근심의 흔적은 지우지 못했다
얼마 전 생겨난 24시 코인빨래방 무인 자판기가 공짜로 커피도 주고 동네 여인들이 숨겨 놓은 감정의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는 빨래터
처자식 학비와 생활비에 손목이 저리도록 구겨진 행적을 다림질하는 날 주름진 이맛살이 서러운지 스팀다리미가 하얗게 운다
배배 꼬인 옷걸이 너머 아슴아슴 이름표 고여 있는 옷걸이에 비닐을 씌우고 주름진 시간을 곱게 펴려는 듯 허리가 휘도록 주름을 잡고 있다.
최병근 시인 / 내 친구 이발사
빨강 파랑 흰색 물감 빙글빙글 돌아가는 삼색 등 아래 이발사라 부르지 말고 예술사라 부르라던 내 친구
의자에 앉은 모델 형체를 잠시 살피다 바리바리깡으로 불사르는 예술혼 직감적인 선의 흐름을 따라가며 짱구인 사람도 평평한 구도를 잡아 깎는다
때론 세파에 탈색된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색조로 덧칠도 하고 침침하고 더부룩한 며늘 찾아 밝고 어둡게 명암을 살려 붓질을 한다
투블럭 기법이나 가르마 기법으로 별 초승달 등 다양한 문양을 새긴다 입점 작가 미용사의 하찮은 미소에 밀려 늘 가난한 조형예술사 내 친구
최병근 시인 / 말의 활주로
혀끝 격납고가 개문하는 순간 세치 혀를 따라가던 말의 비행은 위험한 좌표를 그리며 이륙한다
입 발린 소리들이 긴 비행운을 그린다 난기류에 휘말린 문장들 하얗게 토해놓은 비문의 기류는 항로를 이탈한 듯 기우뚱거렸다
관제탑에 제어를 벗어나 혼돈의 공역에서 비상시키고 추락시켰던 말들 고스란히 블랙박스에 남긴 채 SOS도 없이 추락해 버렸다
따뜻한 말 가득 싣고 골디락스행성* 항로를 따라가는 혀는 말의 활주로였다
*지구와 비슷한 조건을 갖춘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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