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시인 / 결핍의 왕
손목 깊숙이 칼날이 헤집고 들어온 날 온몸이 뜨거워지다가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창밖엔 목소리들이 둥둥 떠있다 좌절의 통로로 세포가 잠긴다 온 동네에 벌써 병이 깊다
바람은 나무를 돌보고 나무는 새를 돌본다
몸에서 풍기는 불확실한 냄새 혼자 밥을 먹는다 숟가락이 밥그릇과 통음하는 신비
두려움이 전쟁을 만든다 거리에 버려진 염소를 기억한다 나무보다 성스러운 존재는 없겠지
사랑을 지닌 밤을 지나 언어를 가진 아침을 지나
당신의 발자국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시와함께》 2021. 여름호
이재훈 시인 / 행려병자
수백만 마디의 말을 쏟아내고 하루치의 밥값을 벌어 동네에 도착했다 골목을 걸으며 늠름하게 풀벌레 소리를 듣고 고샅을 돌아 밤바람을 맞았다 코트 깃 사이로 말들이 새어나왔다 유목민의 피를 얻어 태어난 말 경쟁하지 않아도 모두 불행했다 신문에는 칼부림 소식이 가득했다 신령들은 팔을 휘저으며 걸었다 돌아가신 외삼촌이 찾아오는 꿈 눈동자에서 불꽃이 일고 가슴에 칼 긋는 소리가 났다 흙더미 속으로 내가 쓴 모든 시가 사라졌다 첨탑 십자가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독사의 말이 뱃속에서 피리 소리를 냈다 내 몸은 단풍나무로 변했다 단풍이 메마르는 소리가 온몸에 일렁였다 활기 없는 신비만 남아 몽롱했다 어두운 거리에 자전거를 탄 사람이 저 멀리 공중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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