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시인 / 풍경 재봉사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
때 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김민철 시인 / 굴뚝 많은 나무
바위 속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미루나무에겐 굴뚝이 많다 나는 그것들의 가장자리 위에 앉아 연기를 내려다본다
나는 발목이 가느다란 장수풍뎅이, 저녁 허기 속을 어스름처럼 스쳐 지나와 붉게 그을린 눈앞이 맵다. 하늘을 끌어당기는 눅눅한 바람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사방, 나무뿌리에서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내 날개깃에 깃든 푸르름의 이름들이 들끓는다 귀신처럼 검은 공기를 토해내는 나뭇잎에 감싸인 굴뚝들, 오늘밤엔 또 무엇이 되려는지 빛의 움직임을 움켜쥔 걸까
며칠 전 이곳에 집중호우가 내렸다 지붕까지 걸어온 물의 아가리가 달까지 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물살을 견뎌낸 나무는 햇살로 물을 퍼내고 조심스럽게 보일러를 틀었다
잎사귀에선 밥이 누렇게 익는 냄새도 난다 그 냄새가 애벌레의 등에 동력을 실어주고 있다 잎사귀에 눌러 앉은 애벌레 부부가 악착같이 살아간다
정수리로 치솟은 검은 군불에 홀린 나는 굴뚝 많은 나무에서 젖은 날개를 만진다. 흙 기운을 단단하게 빨아들이는
김민철 시인 / 하모니 사진관
지붕에 두 발을 담그려는 구름 좁은 골목과 내리막길이 만나는 하모니 사진관에 들이치는 이슬비, 가끔 짐차는 하모니 사진관을 지날 때 브레이크를 살살 밟으며 리듬을 탄다 나는 사진관 밖에서 그 하모니를 생각한다 음표를 쓸어 모은 나뭇잎들이 유리창에 어린 의자에 앉아 화음을 맞춘다 합창할 때나 사진 찍을 때나 지휘했던 아버지가 필름처럼 까만 새벽 골목 낯선 집으로 기어 들어간 모습을 포샵하고 싶던 시간들 살구나무에서 노랗게 말라버린 어머니의 모습 우리 가족을 적시고 간 먹구름은 어디 갔을까 오늘도 현상하듯 사진관 문이 열리자 입술 꼬리가 올라간 사내의 표정은 셔터소리와 함께 사진 속에서 환해진다 간신히 셔터소리에 박자를 맞춘 저녁식사 시간 살구나무 가지마다 둥글게 맺히는 초여름의 음표들 가파른 언덕을 넘어온 노을이 그 음표 앞에서 마지막 돌림노래를 끝맺으려 할 때 하모니 사진관에서 찍힌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살구가 되어 데굴데굴 굴러 나온다.
김민철 시인 / 마야 달력의 발견
물 묻은 저녁이 낮게 엎드린다 조용한 공기들이 풀잎 뒤에 숨고 새떼들이 달집을 푸르게 비춰줄 때 무수한 숲의 그림자를 길어 올리는 호수는 별이 어리는 마야 달력이었다. 별빛을 매단 나뭇잎을 먹이로 착각했을까 서로 얼굴을 내미는 조그만 물고기들 나는 당신을 만날 날짜를 수면에 띄우고 멀어지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나무는 그때야 생각난 듯 젖은 가지 끝을 접고, 자기 품으로 저녁을 거둬 가는데 오늘은 모두가 이별을 생각하는 날일까 두 손을 호수에 깊숙이 담그는 노을 나는 제 모습을 보며 한 고비를 빗겨 뻗어가는 붉은 무늬를 겉옷에 수놓았다 하얀 달은 하늘에서 손톱처럼 자라고 시간은 알맞은 때가 오면 그것을 잘라냈다 그 손톱 조각을 쓸어 담고 있는 호수에 우리에게 남겨진 일정표들이 똑 똑, 떨어지고 그 비밀을 물고 달아나는 새떼들이 솟구친다 제자리에서 둥그런 원을 그릴 듯 말 듯 호수에 떠 있는 작은 떠돌이 잎새 하나 제 마야 달력을 넘기지 못하는 저녁이 숲의 외투 주머니에 꽂혀 있다.
김민철 시인 / 단칸방 시위 현장
골목은 어둠의 윤기로 맑고 그윽하다 전봇대에 묶인 CCTV는 골목의 눈동자다 소형차 백미러에 그 눈빛이 어릴 때
길짐승들에겐 소형차 밑이 단칸방이 되었다 그들은 전세도 월세도 아닌 하루 셋방을 보러 다니는 일로 어깨가 무거웠다
어제는 길짐승 한 마리가 차에 깔려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는 눈길을 꾹꾹 누르며 걸어간다 삶을 네 개의 발로 분산시킨 발자국을 겹쳐 밟고 어제의 일을 덮어두고 싶었다 그러나 골목의 약사略史는 밟고 밟히며 단단해진다 CCTV는 그것을 읽어가는 동안 눈 밑까지 성에가 차오른다 고드름은 겨울이 커질수록 길고 날카로워지고 별빛은 독필禿筆이 되어 떨어진다.
눈길에 낯선 소형차가 엔진을 멈춘다 얼어 있던 털가죽이 보드라워진다 꼬리를 흔들며 수북이 쌓인 눈길로 뛰어나올 태세다.
어떤 뭇별들의 무게를 버틴 길짐승이 쓰레기봉투를 뜯어 앞바퀴에서 뒷바퀴까지 쓰레기로 바리게이드를 친다 단칸방을 사수하는 시위 현장이다
김민철 시인 / 짧은 천국
꼬리 끝부터 길을 내기 시작한 상처가 있다 상처자국으로 길이 또 하나 생기는 새벽녘 등허리의 진물은 골판骨板이 된 협곡에 부딪힌다 그럴수록 무표정한 눈은 왜 자꾸 붉게만 변해 가는지
저기, 제 몸의 무게를 조금씩 무너뜨리는 놈이 있다 바람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무게의 가루를 거둬간다 빗물 긋는 날이면 그 무게는 덩어리째 쓸려가기도 했다 그럴수록 무표정한 눈은 왜 자꾸 사나워지는지
담장은 물 속에 네 발을 숨기고 있는 악어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바짝 엎드려 눈을 끔벅거리며 먹이의 움직임을 살피고 몸을 태양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돌린다 그 놈이 노리는 사냥감은 다름 아닌 빛이다
빛은 저 담장을 넘어야 하는 운명이다 빛에게 곡선 같은 도피처가 없다. 모두가 담장의 아가리를 향해 정면으로 내달린다 담장은 빛을 그늘로 소화시켰다
하지만 지금, 담장은 빛의 마파람에도 송곳니가 시리다 무엇 하나 깊은 어둠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다
악어의 악명은 담장 뒤 짧은 그늘로 치부됐다 이승이 짧은 천국이라는 듯 쪽잠에 드는 악어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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