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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순원 시인 / 흐르는 강물처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1.

박순원 시인 / 흐르는 강물처럼

 

 

 갑은 갑의 논리가 있고 을은 을의 논리가 병은 병의 논리 정은 정의 논리가 있다 사실 정의 논리는 논리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갑 오브 갑은 논리가 필요 없다 정이 어느 날 이걸 꼭 해야 하나요? 되묻는 순간 병이 된다 질적 변화 비약을 하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는 것 철광석이 쇠가 되고 쇠가 철판이 되고 다시 자동차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갑 오브 갑이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중얼거리면 이게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긴장한다 갑 오브 갑도 라면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날아가는 비행기에서는 기압이 낮아 병이 정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라면을 맛있게 끓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을이 필요하다 을이 을을을 을질을 해 주면 이를테면 비행기 고도를 낮추어 라면을 맛있게 끓이고 다시 올라간다든가 생각을 해 보면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박순원 시인 /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진주 남강 빨래 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 소리

고개 들어 힐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서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더라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터라

 

 


 

 

박순원 시인 / 아라비안나이트

 

 

 나는 그런데가 좋다 그리고도 그렇고 그러나도 그저 그렇고 그러므로는 딱 질색이다 그런데 그런데야말로 정겹고 반갑다 누가 손가락으로 나를 딱 짚으며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너는?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야 나야 물론 그런데 순딩이 같은 그리고는 개성이 없다 그러나는 까칠하다 그러므로는 고지식하다 그러니까는 촌스럽다 특히 끝의 두 글자 니까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런데는 두루뭉술하면서도 날렵하게 빠져 다닌다 그랜저 같다 그런데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데 말이지 천연덕스럽게 자기가 가고 싶은 쪽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러므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천 개가 넘는 그런데를 본 적이 있다 안 가본 데가 없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는 아주 짧게 짜증도 낼 수 있다 그런데?

 

 


 

 

박순원 시인 / 나는 어부지리로 살고자 하였으나

 

 

어부가 아닌 탓에

염화미소와 전전반측의 나날들

나는 옥에 티가 되고자 하였으나

티끌 모아 태산이 되고자 하였으나

조족지혈에 불과하고자 하였으나

오비이락 배를 떨어뜨리고도

태연히 날아올라 제 갈 길을 가는

까마귀가 되고자 하였으나

풍전등화 바람 앞의 등불

등불과도 같은 상징이 되고자 하였으나

타산지석과 같은 돌이 되고자 하였으나

주객전도

주와 객이 전도될 때 그 묘한 느낌

스릴 아! 내가 주인일 수도 있구나

수주대토의 토끼

토사구팽의 토끼가 될 수도 있겠구나

전전긍긍 긍긍은

의태어 모양이 우습지만 전전에

임하는 긍긍의 자세 태도 입장

긍긍 긍긍

나는 어부지리로 살고자 하였으나

회수를 건넌 귤이 되어

탱자가 되어 탱자 탱자

살고자 하였으나 긍긍

긍긍 허리띠도 없이

바지춤을 움켜쥐고

 

 


 

 

박순원 시인 / 나는 한때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정자 하나 난자 하나였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눈도 코도 없었다

나는 겨자씨보다도 작았고

뱀눈보다도 작았다

나는 왜 채송화가 되지 않고

굼벵이가 되지 않고

나무늘보가 되지 않고

이런 엄청난 결과가 되었나

나는 한때 군인이었다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총을 쏘고 일요일이면

축구를 했다 내가 쏜 총알은

모두 빗나갔지만 나는 한때

군인이었다

나는 지금 삼시 세 때

밥을 먹고 코를 골며

잠이 드는 사람이다

물고기도 다람쥐도 이끼도

곰팡이도 척척 살아가는

것 같은데 별일 없는 것 같은데

다들 좋은 한때를 보내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하고

왜 이렇게 후회가 되는가

겨자씨보다 뱀눈보다

작았던 내가 사람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내가 이렇게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시대에

발을 맞춰 행진을 하고

 

ㅡ시집『그런데 그런데』(2013)에서

 

 


 

박순원 시인

충북 청주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2005년 《서정시학》 겨울호에 〈장례식장 가는 길〉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 <주먹이 운다> <그런데 그런데> <에르고스테롤> <흰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