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상주) / 바나나 속이기
노끈이나 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오래 간단다 그 말 믿지는 않지만, 늦은 오후
바나나 한 송아리를 묶어두기 위해서 나무를 찾다가 바나나 한 송아리를 박아두기 위해서 못을 찾다가 바나나 한 송아리를 매달아두기 위해서 망치를 찾다가
망치를 든 채 전화를 받는다 망치를 든 채 안부를 묻고 망치를 든 채 수다를 떨다가 왜 손에 망치를 들고 있을까, 잊는다 왜 못 하나가 거기 있을까, 잊는다
대화에 열중하느라 무심코 가장 날카로운 말로 애인의 가슴깊이 대못을 박는다 손에 망치와 못이 있으므로 어딘가에는 박아야 하므로
날카로운 말은 빨리 허기를 부르고 배가 고픈 나는 바나나를 먹는다 몸 위로 미끄러져 오는 바나나 내가 밟고 넘어지는 바나나 이윽고, 바나나 껍질처럼 휘어진 미끄러운 밤이 오고
검버섯이 생기기 시작한 바나나 썩어가기 시작해서 향기로운 바나나 검버섯이 피기 시작하는 바나나 바나나 바나나 오 바나나
날카로운 말은 꼭 애인의 가슴에 박아 넣는다 철철 흘리는 피를 보고야 만다
짐짓 속아주는 척 하는 사람아 사랑한다 사랑한다 고백하고 맹세하고 그리고 또 상처를 준다
몰래 기어들어가고 싶은 그림 속 무성한 파초잎 향기로운 이국의 마을에서 비로소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또 다시 망치자루를 드는 나날이여
바나나는 속지 않는다 다만 검은 향기를 풀어놓을 뿐
브래지어를 풀어헤치고 파초잎 지붕 아래 누운 내가 나를 속이기는 바나나를 속이기보다 어려워
오랫동안 나를 속인 나 속고 있는 줄도 모르는 나 이미 속을 대로 속아 더 이상 속을 것이 없는 바나나 오 바나나
계간 『시산맥』 2015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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