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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병일 시인 / 명품 위에 쓴 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1.

이병일 시인 / 명품 위에 쓴 시

 

 

곰발바닥, 자라냄비요리, 오르톨랑, 푸아그라, 펑깐지, 싼쯔얼, 카오야장, 샥스핀 따위 먹지 말자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여, 먹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여 하루 한 끼, 물을 베어 씹어 먹자 물 없이는 청산에서도 살 수가 없다

 

그렇게 물을 마셔댔으면서도 마신 게 없다고 말하는 자 들이여 굶주림과 비만 사이 우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는 물맛을 영원히 잊거나 기억하기 위해 자꾸 절벽이나 돌에 빗소리를 새기는 것이다

 

물에 긁힌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물비늘 잔뜩 붙이고서 다시 일어서지 못한 사람인데, 지느러미 없는 그림자가 휘어져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자꾸 침만 흘린다

 

미식 축제, 거기엔 별별 지옥이 어룽거렸지만 아무도 모른다 끝까지 모르니까 죽을 때까지 뜯고 씹는 것이다 나는 물에 긁혀 돌아온 사람, 눈을 흐려 뜨면 보인다 무엇을 먹어야 다시 서게 될 것인지를, 피 흘리는 몸이 왜 행복한지를, 그러나 너무 늦게 깨닫기에 돌거미같이 핏줄이 말라죽는 것이다

 

-  2021년 <대산문화> 봄호

 

 

 

 


 

 

이병일 시인 /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땅을 파야 합니다 봄엔 더 죽을 것도 없으니까

씨앗을 뿌려야 하겠지요

더 이룰 것도 없는 몸이니까 땅을 밟아야 하겠지요

세상이 어떠한지 묻지 않았지요

그냥 조용히 밤의 거인이 크게 자라지 않도록

한 가지 노래를 고상하게 불렀겠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거미에게 갉아 먹혀도 새는 새 몸으로 날아온다는 것이죠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벌레가 많으면 마음이 울렁거리지 않죠

땅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봄이 온다고 믿지 않게 돼요

 

사랑을 위해 쇄골 숨을 크게 돌렸다지요

피를 아홉 번이나 흘렸다는 것에 기꺼워하면서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았죠 왜냐하면

바위 언덕에 수수 씨를 뿌리며 맨발로 땅을 밟았거든요

땅을 예쁘게 밟으면 뺨과 이마 위에서 기쁨이 솟는대요

 

아, 세상 모든 것과 통하는 이 아름다움, 말로 하기엔

서러울지도 그러나 흙빛으로 발새 씻듯이 얘기하면

새와 돌은 바람무늬로 몸을 깁고 낮과 밤을 꿰어오죠

 

* 영화, <타인의 삶>에서.

 

 


 

 

이병일 시인 / 호랑이

 

 

호랑이, 어슬렁어슬렁 꼬리 흔들면서 꽃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아니 꽃나무를 찢고 나온다

심심치 않게 얼룩무늬 들고 일어서는 호랑이,

아가리를 벌리고 간헐적으로 잔기침을 뱉는다

 

호랑이의 뻣뻣한 수염이 잠들면, 꽃잎이 벌렁벌렁 공중에 드러눕고 만다

그러나 낮잠에서 깬 호랑이는 더 깊숙이 봄산 속으로 들어간다

 

후미진 꽃나무에게 흘깃흘깃 들키는 호랑이,

제 피가 비치는 샅을 씻고 봄산 구석구석에 호랑이 눈동자를 박는다

 

큰 산모퉁이와 작은 산모퉁이를 친친 감은 호랑이,

양미간에 꽃물인지 핏물인지 뒤범벅일 때,

호랑이는 어디로 흩어져 갈까? 빽빽해지는 꽃눈이 녹는다,

꽃눈이 떨어진다

 

 


 

 

이병일 시인 / 나의 에덴

 

 

아무도 닿은 적이 없어 늘 발가벗고 있는 깊은 산,

벌거벗은 아흔아홉 개의 계곡을 가진 깊은 산에 홀리고 싶어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물소리를 붙잡고 싶어

산부전나비 쫓다가 무심하게 건드린 벌집,

나는 또 캄캄하게 절벽으로 밀리고 급기야 날숨 희어질 때까지

물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바위 그늘 밑 어스름을 좋아하는 모래무지가 되었다

 

도깨비불과 접신하기 좋은 나의 에덴! 깊은 산으로 가자,

미친 것들 푸르러지고, 죽은 것들 되살아나는 깊은 산으로 가자,

산빛에 젖어갈수록 나는 감감해지고 그림자는 쓸데없이 또렷해진다

 

 


 

 

이병일 시인 / 무릎이 빚은 둥근 각

 

 

나는 무용수의 세워진 발끝보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할 때의

여자의 무릎이 빚는 둥근 각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무릎부터 시작된 기도의 자세,

여자의 무릎은 점점 더 둥그렇게 휘며

정신은 수직에 가까워진다

 

예배당 열린 창의 커튼이 휘날리는데도

방석과 여자의 무릎 사이는 점점 깊어진다

 

글썽이는 것들은 모두 무릎 속에 묻히고

감추어진 두 발은 엉덩이 밑에서 십자가가 되고

오늘도 여자는 어깨와 몸통을 비추는

빛의 기도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뼈와 뼈 마디마디를

온통, 주일 아침의 수면으로 잠그고 있다

여자는 우아하게 다리를 뻗고도 싶겠지만

기도를 위해

무릎의 둥근 시간을 펼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요일과 금요일 새벽 혹은 저녁마다

어둠뿐인 곳에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여자의 무릎 기도,

꽃이 되고 꽃눈나비가 되고 하나님이 되어

어제 쓴 참회록을 들여다보고 있을 듯하다

 

그때 나는 기도에 집중된 여자의 무릎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둥근 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병일 시인

1981년 전북 진안에서 출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졸업. 2005년《평화신문 신춘문예》와 2007년 《문학수첩》신인상 시 당선.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희곡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옆구리의 발견』(창비, 2012)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이 있음. 2014.09. 수주문학상 시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