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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병근 시인 / 굴뚝꽃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1.

최병근 시인 / 굴뚝꽃

 

 

그늘진 저녁

굴뚝을 읽는다

 

불길 속 나무의 뼈가

망울망울 풀어져

상형문자로 걸렸다

 

저 하얀 연기

수국처럼 피었다 사그라지는

목록의 흔적

실낱같은 가계가 선명하다

 

까맣게 타들어가

새겨진 지문

굴뚝굴뚝 피어난 꽃

 

 


 

 

최병근 시인 / 파리의 자궁

 

 

대롱대롱 벽에 걸린 북어를 읽는다

아직 다 쏟지 못한 말이 있는지

떡 하니 입 벌리고 있다

 

할복당한 몸뚱이에

친친 감긴 명주 실타래

채 풀지 못한 고해의 사연이다

 

배회하던 파리 한 마리

입 속으로 들어가

재빨리 알을 까놓고 달아난다

 

말을 버리니

파리의 자궁이 된 것이다

 

 


 

 

최병근 시인 / 모기 견인차

 

 

예민한 주둥이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늘 후미진 곳에 숨어 기다리다가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타전되는 순간

피 냄새를 따라 현장으로 질주한다

 

한 방울 피라도 먼저 빨아야 하기에

잠드는 순간인데도 윙윙거린다

극성스러운 소음을 내지르며

경찰이나 소방차보다 더 빨리 발진한다

 

교통사고로 부서진 차량은

떠가는 게 임자라는 견인의 법칙

선착순 준비된 먹잇감을 찾아

늦은 밤 교각 아래 웅크린 모기떼들

 

 


 

 

최병근 시인 / 가득한 틈

 

 

돌하르방이 틈을 내어주자

구멍 난 틈의 허점과 간격을 따라

비틀비틀 술 취한 듯

담쟁이넝쿨 기어오른다

 

봉명동 520번지 충만치킨 골목

바람 틈에서 빈 소주병이 울며

서로의 빈틈을 삿대질하고 있다

살다 보면 틈 없는 사람이 있을까

 

틈이란

작은 새 둥지도 되듯

이 비좁은 사이가

나를 살게 한다고 고함을 치는데

 

어딘가 허술해 보이지만

그저 허망한 틈인 줄 아니?

돌담장의 틈이 바람에 견고하듯

사람의 빈 틈에서 우정도 생기지

 

밤새도록 서로의 틈을 따지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저 주정뱅이들아

빈 틈 없는 사람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 누군지 아니?

 

 


 

 

최병근 시인 / 수건의 배후

 

 

접어둔 사연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세면대 옆에 걸린 수건

누군가의 젖은 몸을 기다리고 있어요

세탁실로 직행하는 짧은 기다림이지만

저마다의 이력은 빼곡합니다

 

퇴직 후 개업한 친구의 빵집

회사의 창립기념일

돌잔치 칠순잔치

수건의 배후에 날짜와 기념일이

달력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장의 수건에서

어떤 날은 친구의 빵집에 발을 닦고

어떤 날은 돌잔치와 칠순잔치

번갈아가며 펄럭이는 저 기억들

 

가끔은 당신이 준 질긴 흔적에

오래된 얼굴이 흔들립니다

 

 


 

 

최병근 시인 / 행복한 아미쉬*

 

 

뉴욕에서 해리스버그로 가는 78번 고속도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와 캐나다의 온타리오주에는

문명을 거부하고 사는 종교단체가 있다

 

기다란 턱수염에 검은 옷과 나무 마차를 타며

문명을 거부하고 단순한 것을 고집하며

느리고 불편한 삶을 행복이라 여기는 아미쉬

 

뉴욕의 상징 타임스퀘어

하늘로 치솟은 빌딩 숲의 흥분된 발기 아래

가난한 노동을 쥐어짠 광고물이 즐비하다

 

돌아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방금 전 시동을 끈 자동차 열쇠가 들려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의 회전 바퀴에

깔리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모습으로

 

순간, 나는 열었던 거울을 닫아 버렸다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거주하며 문명을 거부하고 사는 종교단체.

 

 


 

 

최병근 시인 / 직선의 방정식

 

 

잠시 호흡을 멈추고

무거운 총신을 사대에 올려놓는다

 

원심을 따라 조준선을 정렬하고

조금은 계산적으로 겨눈 과녁의 블랙홀

기울기가 m이고 절편이 n인 직전의 방정식

y=mx+n

정답은 일정한 속도로 계산되었다

교차할 수 없는 그리움의 선 같은

 

단단한 원심의 가늠자 너머에는

둥근 직선의 세상이 열려있다

 

시집 『말의 활주로』 (지혜, 2020)

 

 


 

최병근 시인

충남 보령에서 출생, 2019년 《문예연구》와 2020년《애지》로 등단. 시집으로 『바람의 지휘자』 『말의 활주로』가 있음. 현재〈수레바퀴〉와 〈시산맥〉 〈텃밭〉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