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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재 시인 / 백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1.

김선재 시인 / 백白

 

 

일어선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습관처럼 창문은 높고

바닥은

끝 간 데 없었다

 

우리는 물속에 언 발을 담가놓고 나왔다

누군가는 묻고 누군가는

답해야 하니까

 

뛰어오를 때마다

바람이 길을 건너갔고

솟아올랐던

허공이 천천히 가라앉는 동안

 

말없이

 

우는 새가 우는 새를 부르거나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엎드려 잠을 잤다

 

어깨가 없어서

혼자 울고

혼자

깨어났다

 

이제는 뭘 해야 하지

내가 중얼거렸을 때

 

우리는 마주 보고 팔을 흔들었다

이쪽과 그쪽이 생길 때까지

 

햇빛을 통과한 새가 그림자를 떨어뜨린다

발이 걸어오고 있었다

 

 


 

 

김선재 시인 / 마흔

 

 

그늘에서 그늘로 건너뛰죠 나의 행방은 알 수 없어요 여름은 아직 한창이니까

 

물속에서 눈을 뜨는 아침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면 햇빛처럼 멀리 갈 텐데 소매를 걷어 올리면 목덜미가 지워져요 목에서 숨을 지우면 매일은 없겠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말의 뼈는 희고 반짝입니다

 

호루라기를 불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름들 누군가 밟았던 자리에 설 때마다 바닥이 지워져요 바닥 없는 말들이 끝없이 떨어지고 있어요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색깔이 되어 부드러운 크림처럼 원을 그리며

 

내다놓은 갈피 사이에서 이끼가 자라요 갈피 없이도 그늘은 불어나고 불려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죠 스물처럼 깃털을 부풀리면 말도 안 되는 나날 누구의 것도 아닌 입을 막아도 할 말이 남는

 

질문을 씹으며 꼭꼭

대답을 숨기는

나는 이제

멀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손나팔이 불겠죠

 

마침내

방금 잠에서 깬 얼굴이 되어

가늘고 긴 소리가 되어

 

동풍이 창문을 무너뜨리고 있어요

 

 


 

김선재 시인

1971년 경남 통영 출생.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6년 《실천문학》에 소설부문, 2007년 《현대문학》에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 『얼룩의 탄생』(문학과지성사, 2012), 『목성에서의 하루』와 소설 『그녀가 보인다』(문학과지성사, 201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