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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석호 시인 / 이슬의 지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1.

한석호 시인 / 이슬의 지문

 

 

이슬에 젖은 바람의 결을 만지고 있으면

시간의 발자국소리 쪽으로 동그랗게 귀 모으는

나의 옛집이 문을 여는 것만 같다.

담장이 붉은 그 집 정원에 앉아 있으면

낡은 기억을 벗어던지는

문패의 거칠고 주름진 손이 어둠 속에서도 읽히고

제상문(蹄狀紋)의 촉각 끝에서 피어나는

맨드라미 채송화 분꽃들

한창 역사중이다.

가끔은 해독되지 않는 기억들 저편에서

저 사춘기 적 보리밭과

첫사랑 데리고 떠나간 간이역이 궁륭(穹?)처럼 일어나

나를 출발점으로 데려가려 한다.

그럴 때 나는 원고지를 꺼내어

그대에게 길고 긴 안부를 물으리라.

밀려오는 이 거대한 적막과

그 적막 사이를 노 저어 다니는 시간의 사자(使者)와

채울수록 더 비어만 가는 텅 빔과

풀수록 더 꼬여만 가는 생의 어지럼증과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먹구름의 너머에 대해서.

이슬의 지문을 조회하면 누군가가

내 기억의 언저리에서 동그랗게 손 모으고 있다.

순장한 나의 아틀란티스 엿보려

저 투명하고 둥근 신의 렌즈로 날 길어 올리고 있다.

 

 


 

 

한석호 시인 / 아이리스

 

 

이 밤이 눈뜨기 전에 나는 돌아가야 하네.

겹겹의 어둠을 쓴 나를 찾아

나는 나에게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네.

격동의 바람이 불 때 기차는 늘 만원이지,

가랑잎 지폐 같은 나를 싣고 레일은 미끄러지고 있네.

혁명은 언제나 세상 밖에서

세상 안의 나를 끝없이 마중 나가는 일.

이럴 땐 아무 노래라도 어울리겠지만

내 안에서 발원된 향기는

나를 지우고 달리는 상상력을 지우고

내 말의 입술과 그 둥근 기억마저 아득히 봉합하네.

나는 머루와인을 저장한 당신의 토굴 속에

내 노래의 심장을 가두고 밀봉하리.

봄빛이 소인한 엽서가 그대 손에서 낙엽이 되어

몽블랑의 흰 수리처럼 날 때까지. 하강과 상승의 내재율이 부드럽게 편제(編制)된 한 편의 시를 만날 때까지.

격동의 바람이 불 때 기차는 늘 만원이지,

나만 사랑하겠다는 그대의

그 진한 가슴에 낡은 꽃 한 송이 소인하고 있는

저기 자줏빛 구름은 나의 폐허,

뭇별들이 나의 폐허 위에 모닥불 피우고 있네.

 

* 아이리스 : 영국 억류 작가 아이리스 머독, 붓꽃.

 

 


 

 

한석호 시인 / 불새의 잠

 

 

드므에 빠진

누군가의 잠 속으로 새떼가 날아들 때

나는 그대라는 노을의 강가에 서 있겠습니다.

내 거칠고 단단한 부리로는

붉은 창살을 헤집어 끝없이 기포를 만들고

양 날개로는 뚜벅대던 시간의 체중을 재고 싶습니다.

새들이 잠을 날갯죽지 속에 묻고

저편으로 사라진 그리운 것들의 안부를 묻습니다.

구부러진 길들의 궤적을 촘촘히 기록하던 햇살이

내 삶의 물갈퀴에 잠시 앉았다 갑니다.

집 나온 햇살의 뒤를 쫓던 개들의 영혼도

잠시 쉬었다 가는 흰 강,

거친 해역의 파도처럼 아가미를 퍼렇게 드러내며

몸 뒤집는 내 고단한 어제들

저녁의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닷재들의 은하(銀河)를 한없이 떠도는 별들.

태공들의 담배 연기가 밤의 다리 난간에 매달린 노을을

물끄러미 낚고 있습니다.

함부로 방사했던 시간들이 무릎을 꺾고 단정하게 깃을 모읍니다.

이제, 나는 구겨진 내 하루의 손을 잡고

아득히 깊어지는 잠의 드므 속으로 들어야 합니다.

커다란 불새 한 마리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강가에서.

 

- 시집 『이슬의 지문』에서

 

 


 

한석호 시인

1958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경희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7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이슬의 지문』(천년의시작, 2013)이 있음. 현 서울 중부경찰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