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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현채 시인 / 투란도트의 수수께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2.

이현채 시인 / 투란도트의 수수께끼

 

 

눅눅한 밤바람과 속삭이던 방탕한 시계가 새벽 다섯 시를 알릴 때 은둔하던 나무들이 나그네쥐들을 불러놓고 시간과 그림자의 결혼식을 바람의 장례식과 함께 치루고 있다 침묵만이 안개 숲에서 훌쩍인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빈 맥주 캔들이 대답 없는 말을 걸 뿐이다 바이올린이 길게 울려 퍼지고 창문을 두들기는 빗방울은 쉼 없이 방을 넘본다 창문에서 쇳내가 난다 거울의 재판을 기다리는 나의 귀에는 불청객이 가득하다 등장인물이 없는 그림자로 새 한 마리 날아든다

 

이방인이여, 운명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수수께끼는 세 개

죽음은 하나,

껑충 뛰는 알약을 삼키고

바다의 잠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현채 시인 / 선플라워

 

 

마당 댓돌에 앉아 해만을 뚫어져라 바라본 적이 있다 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해를 바라보듯 어느 한 곳을 바라본다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의 체온을 느낀다 소파에서 웅크리고 자던 그의 모습과 똑같이 누워 있으면 그와 함께 누워 있는 것 같다

 

내 마음을 주니 1+1을 원한다

내 안에서 들리는 울음소리

 

시식용으로 남겨진 불판 위에 올려놓은 겨울은 호객하는 바람과 함께 격투기를 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빈 벤치에 흰 눈이 내려앉는다

어물전의 비릿한,

바다를 옮겨 놓고 한밤의 별들도 내려와 앉는다

 

내 생을 집게로 집어 올리다 보면 참기름 냄새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뒤집어진 채 발버둥 친다 절망의 농도는

깊어지고 눈에서는 모래눈물이 흐른다

 

얼굴에 피어싱 되는 눈물들

몸속의 장기들마저 시끄럽게 울고 있다

 

가로등도 울먹인다

 

버스 정류장까지 내려갔다 올라왔다 하며 내 마음에 터뜨려지는 반짝이들이 불륜의 날씨 속에 함박눈으로 내린다

 

 


 

 

이현채 시인 / 빈집

 

 

산을 거실로 들인다 하늘언덕이 있는 산을 들인다

망토를 걸친 아이가 뛰노는 눈썹이 긴

마법의 산

 

산 속에 등불을 밝히고

동화책 속 책갈피로 끼워진

나를 읽는다

 

텅 빈,

껍데기만 남은 집에서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칭얼대는 창밖을 바라보는데

멀리 떠나 버린 환영 속의 아이가 나무란다

 

또 산을 가져다 놓았네요 산에는 마녀가 있어요

네가 보고 싶어서 그래

산은 너처럼 칭얼대거든

 

물안개 떠도는 일기장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뱀 한 마리

혀를 날름거리며 주문을 왼다

 

 


 

 

이현채 시인 / 블루1- 날 바라보지 말아요

 

 

날 바라보지 말아요 나는 보기만 해도 울음이 나오는 악기에요 날 바라보지 말아요 당신의 무표정도 나를 슬프게 해요 난 입만 열어도 울음이 나오는 악기에요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낼지 몰라요 한번 소리 내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아요 후두둑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져요 비는 내 울음을 읽어요

 

네 영혼은 늘 자유를 꿈꾸고 있잖아 맘껏 낙서를 해 네 영혼은 자유를 꿈꾸는 낙서장이야 이 세상 최고의 낙서는 사랑이야 그것이 바로 시야 시는 도덕이 아니고 위반하는 거야

 

난 하늘을 나는 호수에 물고기도 키우고 기린도 살게 해요 그렇지만 나는 가슴앓이만 해요 어디다 하소연도 못해요 내 꽃밭을 침범해 오는 한 여자를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어요 도둑고양이처럼 나 몰래 나타나 꽃을 꺾어 자기 방에 꽂아 놓아요 구토가 나요 내 몸에서는 가시가 돋아요 핏기 잃은 침묵 속에서 가시를 키워요

 

지금 나는 슬픔으로 가득차서 누굴 바라 볼 수도 없어요 나는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나오는 악기에요 나의 시간 속으로 비가 내려요 비는 내 눈물을 읽어요

 

 


 

 

이현채 시인 / 흐린 날 연못으로 걸어 들어간다

 

 

 안개비 내리는 흐린 날이면 장자 못에 간다 물속으로 하늘이 걸어 내려오는 연못에서 물보라 이는 꽃이 피고 고층 아파트들이 고개 숙여 물장구친다 한 살림이 내려와 발 담그면 다른 살림도 물속을 기웃거린다 구겨진 종이쪽지처럼 우울한 날이면 나는 장자 못에 간다 용궁 전설이라도 얻어 들으려 잡동사니 살림을 끌고 물가에 서면 얼비치는 방들이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아이가 얼굴이 퉁퉁 부은 채 키를 키우고 남자도 몇 배나 키를 키워 물풀처럼 겨우 견디고 있는 내 작은 소망들이 물 먹고 있다 아무도 불러주는 이 없는 장자 못에서 나는 허튼 살림을 끌고 물속의 다른 집들을 기웃거린다

 

 


 

이현채 시인

1966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 2008년 《창작21》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투란도트의 수수께끼』(지혜사랑, 2011), 『시뮬라시옹』(한국문연, 2020) 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