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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주 시인 / 농장행 버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2.
제목 없음

이정주 시인 / 농장행 버스

 

 

 버스 속에는 나 혼자 앉아 있다. 버스가 서고 앞문으로 여자가 올라온다. 여자는 버스 속을 불안한 눈으로 살펴본다. 숙희다. 숙희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생겼다. 숙희의 등은 구부러졌다. 엉덩이도 뒤로 빠져 있다. 버스가 움직인다. 숙희는 뒤뚱거리다가 자리에 가 앉는다. 앉은 모습을 쳐다보니 분명해졌다. 닭이다. 닭이 되었구나 숙희가. 늙은 암탉이 되었구나. 숙희는 가끔 고개를 돌려 버스 속 을 훑어본다. 나는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잠시 후 손을 내린다. 못 알아 볼 거다. 나도 돼지가 되었으니까.

 

 농장이 가까워졌다. 숙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뒤뚱뒤뚱 문으로 간다. 버스가 서고 문이 열리고 숙희는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간 다. 나는 모습을 보니 닭이 아니다. 커다란 재다.

 

 농장 앞에 버스가 서고 버스에서 큰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버스 속에서 돼지 한 마리가 바깥을 쳐다보고 있다.

 

 


 

 

이정주 시인 / 종이 여자

 

 

 나는 종이 여자의 몸에 글을 썼네. 여자는 온몸을 뒤틀며 내 글을 받았네, 가슴을 지나 엉덩이를 거쳐 발바닥까지 글을 썼네. 더 쓸 데가 없었네. 여자는 자고 있었네. 나는 만 년 필을 던져 버렸네. 그리고 쓰러져 버렸네. 아침에 여자의 몸은 깨끗해졌네. 밤새 새겼던 글들이 지워졌네. 여자는 나를 보고 뽀얗게 웃었네. 창 밖에서 강물이 잉크 색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네. 나는 여자에게 다가갔어. 그리고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네. 여자는 손으로 내 등을 토닥거렸네. 나는 내 몸이 맑아지는 걸 느꼈네. 강가에는 바람 이 자라고 있었네. 나도 종잇장처럼 가벼워 졌네. 나는 여자를 안고 크게 웃었네. 여자도 웃었네. 웃음 끝에 눈물, 어제 썼던 이야기가 내 눈에서 파랗게 번져 나왔네.

 

 


 

 

이정주 시인 / 붉은 사과 속의 푸른 사과

 

 

접시 위에 붉은 사과가 있다

 

나는 사과를 깎는다

칼 끝에 철조망이 걸린다

나는 철조망을 뽑아 낸다

시멘트 기둥 몇 개가 따라나온다

나는 사과를 깎는다

깎아 들어갈수록 사과 속은 붉어진다

사과밭에서 붉은 손들이 흔들린다

붉은 손들 속에 푸른 손들도 간혹 보인다

붉은 길도 과수원 울타리를 돌아만 가고

아무리 걸어가도

과수원 속의 집은 보이지 않는다

길을 따라가며 나는 사과 열매를 바라본다

붉은 열매는 거의 다 사라지고

푸른 열매들이 매달려 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사과나무로 다가간다

푸른 사과를 따서 한 입 베어문다

사과는 문처럼 스르르 열린다

사과 속에서 여자 하나가

아이를 안고 걸어 나온다

 

접시 위에 칼 한 자루와

푸른 사과 껍질이 놓여 있다.

 

 


 

 

이정주 시인 / 곰팡이 모더니즘

 

 

8월에는 끝없이 비가 내렸다

옥타비오 파스를 읽었다

옥타비오 파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 티셔츠는 땀에 젖었다

나는 티셔츠를 빨아서

벽 앞에 걸어 두었다

 

8월에는 끝없이 비가 내렸다

빗속에 웃통을 벗고 서 있어도

옥타비오 파스는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가 발가벗고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벽에 걸려 있던 내 티셔츠가 없어졌다

티셔츠가 있던 자리에 곰팡이가

까맣게 일어서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 티셔츠를 입고 옥타비오 파스가

창 밖을 지나가고 있었다

 

수건을 아랫도리에 감고

나는 집을 나섰다

하하하하

들고 있던 우산을 하늘로 던지며

옥타비오 파스는 웃으며 사라졌다

나는 빛속에 서 있었다

내 머리가 터지고 있었다

나는 수건을 풀어 내 머리에 감았다

가까운 어디서 번개가 쳤다.

 

 


 

 

이정주 시인 / 홍등

 

 

 이삿짐을 싣고 트럭이 지나간다. 점 보는 집이 지나간다. 얼굴 씻긴 후보들이 지나간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화투치는 여자들이 지나간다. 붉은 등 아래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여자도 지나간다. 붉은 등이 그립던 날들과 엥겔스가 옳다고 생각한 날들이 지나간다. 보리밥집과 나무문 만드는 집이 지나간다. 이윽고, 지나간 것들이 다시 돌아온다. 나무문 만드는 집 나무문이 닫힌다. 보리밥은 식어 있다. 길가에 나와 있던 여자가 없어졌다. 붉은 얼굴의 여자들을 누이라 고 생각하던 날들이 돌아온다. 외등이 꺼지고 점포 안이 붉다. 술상을 보는 여자들 뒤로 숨은 엥겔스가 보인다. 나는 빈자리에 차를 집어넣는다. 붉은 얼굴로 졸고 있는 푸줏간 여자가 보인다.

 

 


 

이정주 시인

1953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약대 약학과 졸업.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외국문학》 편집장 및 출판사 편집장 역임. 시집으로 『행복한 그림자』, 『문밖에 계시는 아버지』, 『의심하고 있구나』, 『홍등』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