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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병철 시인 / 소나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2.

이병철 시인 / 소나기

 

 

구름 위에서 신이 푸른 몸집을 불리는 동안 구름 아래 우리는 계절을 반씩 잘라먹으며 말싸움을 한다 끝없는 네 주장을 듣고 있으니 텅 빈 반성문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다 네가 뭐라고 말할 때마다 하얀 글자들이 귀를 씻겨주는 것 같아 이 말싸움이 끝나지 않으면 좋겠어 꽃잎처럼 붉고 나비 날개보다 가벼운 네 혀가 내 지겨운 꿈들을 저 세상으로 떼밀어주니까

 

최초의 사랑과 살인이 모두 말싸움에서 시작됐다는 거 알아? 이 대화가 끝나면 우리는 서로를 죽이려 들지도 몰라 싸우면서 자라는 아이들처럼 우리도 흩어지는 말들을 쌓아올려 구름 위까지 올라가 보자 응? 닥치고 내 말 들으라고? 나는 닥치고 귀를 펄럭인다 네 저기압이 무거운 빗방울들을 끌어내릴 때

 

신이 파랗게 쏟아지며 소리친다 접이식 3단 우산이 너희의 방주야! 우산 밖에서는 비가, 우산 속에서는 섬유유연제 향기가 내 서툰 사랑의 구원인 오늘, 서로 더 말하지 못하게 입술을 삼켜 한 문장짜리 책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신앙

 

 


 

 

이병철 시인 / 어떤 종교의 학습

 

 

어제 시작된 종교에는 사랑보다 기도가 무성하다

아직 신앙을 모르는 무릎은 장마처럼 푸르고

수레에서 쏟아지는 청사과들과 함께 분별없이 빛난다

사과껍질을 예쁘게 깎아내는 너는 새하얀 구원

이빨이 닿을 때마다 씨앗이 열리는 몸

내 귀에 말씀은 달고 달아서

가뭄이 들면 심장에 분수가 솟고

홍수가 나도 살이 무르지 않을 것만 같은 믿음

 

기도가 사랑이 되기까지는 백 년쯤 걸린다지

사과나무에서 소금이 자라나는 여름은

사랑을 모른 채 휘발되는 영혼들의 수다

나는 오랫동안 이 종교를 학습했으므로

별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라진 한낮에도

네가 살던 세상의 투명한 잔영들을 이어 붙여

사다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닿지 못하는 천국이 끝내 지옥이라 하더라도

 

 


 

 

이병철 시인 / 도미노 놀이

 

 

공사장에서 우리는 무슨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개들이 짝짓기 하는 냄새야 아니야 날지 못하는 새의 똥 냄새야

죽은 사람 냄새야,

시멘트 먼지 속으로 우리는 코를 킁킁거렸다

 

죽은 사람 냄새는 슬프다

 

슬픈 게 뭔지 어떻게 알아? 그건 아직 배우지 않았잖아

철근 위로 어둠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일어서자

우리는 냄새 쪽으로 자갈을 집어 던졌다

 

저기엔 아무도 없어, 여기서 자고 갈래?

무서워 너희들 등 뒤로 냄새가 따라오는 게 보여

겁쟁이, 우리는 안 죽어

 

냄새로부터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너희는 몰라

 

어둠이 냄새를 환하게 밝히는데

너희는 죽음의 냄새 같은 건 없다는 듯

벽돌로 도미노 놀이를 하며 웃고 있었어

 

그날 밤, 나는 공사장에 코를 두고 왔다

어떤 꿈에선 앞으로 나란히,

도미노처럼 넘어지는 너희를 본다

 

누가 너희를 밀었니?

아무도 웃지 않는다, 냄새가 난다

 

내가 마지막 블록이 될게

 

 


 

 

이병철 시인 / 오늘의 냄새

 

 

낮이 화창하면 저녁은 우글거린다. 쇠고기 스튜, 까르미네르 와인, 음식물 쓰레기,

달, 키스, 피, 오이비누. 냄새가 모인 골목엔 아이들이 뛰어놀고, 냄새를 못 맡는 노인들은 스스로 냄새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익숙함을 기억할 뿐 코는 감각하지 못한다. 담배와 꽃, 쇠와 유리 사이로 아까시가 우유처럼 엎질러지는 오늘, 냄새와 향기는 어떻게 다르지? 냄새는 향기를 흉내 내고 향기는 어쩔 수 없이 냄새가 된다. 나는 네 향기보다 냄새가 좋아. 우리가 누운 자리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된 쇠고기 스튜와 키스가 된 까르미네르 와인과 오이비누에 씻겨나간 핏물 위로 달이 부풀었다. 너한테서 모르는 냄새가 난다. 이제 우리는 코와 새끼발가락만큼 멀어질 거야. 너는 발을 코에 갖다 대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이미 죽은 땀 냄새 살 냄새가 우리의 마음이야. 창문을 열자 새벽이 짙은 몸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은 귀신, 서로의 냄새가 너무 익숙한 우리는 귀신처럼 새벽을 걸었다. 손을 잡아도 손이 없고 어깨를 빌려줘도 머리가 없는.

 

 


 

 

이병철 시인 / 불과 빨강과 뱀

 

 

입속에서 몇 번, 계절이 바뀌어

 

네가 늦봄을 내밀 때 나는

꽃잎에 덮인 꿀벌들의 소로와

벼랑 틈 숨은 폭포를 몰래 감춘다

 

우리는 속으로만 스며드는 핏물을 붙잡고

선지 덩어리로 굳어지는 중이야

아니, 은밀한 배꼽까지 활짝 열고

진공 상태의 죽음을 듣고 있는지도 모르지

 

혀끝의 여름, 혀끝의 겨울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해?

나는 모퉁이들로 우글거리는 마을이 될 거야

불붙은 얼음들이 떠다니는 테트리스도 좋고

 

그건 그렇고, 너는 정말 달다

 

이빨 사이마다 체온계가 꽂혀 있어

우리는 이제 전염병 창궐한 격리병동이야

비린내 나는 해동생선이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흉한 점괘야

 

서로가 도망 못 가게 불과 빨강과 뱀으로

묶어도 묶어도 아름다운 음악처럼 풀어져버리고

계절이 바뀌어도 도깨비 뿔 같은 종유석만 밀어 올리는

 

우리는 서로 입 벌린 무덤이 되어

하루 종일 먹고 뱉고 먹고 뱉고

삼키지도 못하면서 죽었다가 부활하는

장난, 목구멍 타들어가는 불장난만 하면서

 

 


 

이병철 시인

1984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2014년 《시인수첩》을 통해 등단. 2014년 《작가세계》 평론 등단. 시집 『오늘의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