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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백규 시인 / 여름의 먼 곳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1.

최백규 시인 / 여름의 먼 곳

 

 

이 세계는 나에게 자폐를 앓고 있다

길가에 죽은 고양이 속에도 희망이 없다 내장 뜯는 쥐가 있다

아버지는 몇 달째 방 안에 누워 썩어만 가고

어머니는 문 열 때마다 숨소리 확인한다

그녀의 돌아앉은 등과 그의 남은 생 사이 간격마저 흐릿해지면

지구가 가진 모든 시간이 눈동자 위 멈추고

나는 이미 늙었다 꽃 피는 계절에

세상의 모든 고아들이 한 식탁에 모여 앉아 식은 밥알 씹듯

사람들은 한 아름의 치욕과 허탈을 삼킨다

주기적으로 상처가 벌어질 때마다 아득해지는 천국 그리고 이곳의 간극

밤에 나갔다가 낮에 쌀을 사 들고 돌아오는 골목에서 매일

바람이 죽어가는 것을 본다 햇살은 시끄러웠다.

 

 


 

 

최백규 시인 / 유해

 

 

내가 죽은 거라 믿었는데

손을 마주 잡으면 따스했다

 

여과되지 않은 햇살이 심장에 뚫고 들어와 아스라이 퍼졌다

 

얼룩덜룩 물들었다

 

한 번이라도 죽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아물지 않았다 그저 차가워졌다

죽기 전부터 조금씩 그래왔다.

넋을 잃고

 

천변을 걸었다 마른 팔목을 쓸면 무언가 놓쳐 깨뜨리는 것 같았다 쏟아진 너를 주워 담으려 웅크렸다. 함께 생필품을 사오던 길이 폭염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흐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움켜쥐지 못한 손마디가 끈적해지도록

 

우리가 있던 세상에서 나만 살아도 될까 그곳에서 이곳을 보면 네가 홀로 너무 외로워질 텐데 괜찮을까

 

우리는 훔쳐둔 것을 다 잃은 심정으로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지 않은 채 건너다녔다 이상할 정도로 거리에 아무도 없었다

꿈이로구나

값싼 폭죽이 멎을 때까지 유기견의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새하얗게 센 뒷덜미로 눈송이가 정갈히 부딪혔다 검은 옷을 입은 내가 너의 군락에 장미 가시로 돋은 것 같아 불안해졌다 너는 손안에 꽃송이를 가만히 쥐여주었다

이것이 전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라며

 

눈을 떴을 때에는 얼굴 위로 무거운 빛이 내려앉고 있었고

손바닥을 펴 보니 한 줌의 온기만이 희미하게 묻어 나왔다

 

뿌리를 적시듯

한 몸에서 오래도록 죽고 살았다.

 

 


 

최백규 시인

1992년 대구에서 출생. 2014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으로 등단.〈뿔〉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