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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은정 시인 / 대화의 방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5.

박은정 시인 / 대화의 방법

 

 

평생 인형의 얼굴을 파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는 아이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내 이빨은 단단해졌다.

말을 해도 말이 하고 싶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되물어보던 허기처럼

형광등은 깜빡이고

인형은 얼굴도 없이 던져졌다

 

오늘 이 자리,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앉아

손뼉을 치며 웃는다

 

 


 

 

박은정 시인 / 눈에 박힌 말들이 떠나간다

 

 

강풍이 불었다 한다

내일은 빙판길일 거라 했다

무릎이 잠길 정도로 눈이 쌓였다고 하더니

어디선가 들려온 캐럴이 잠든 이를 외롭게 만들던

그런 혹한의 밤이었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눈으로 눌러쓰듯이

실수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사소한 토씨 하나가 바람처럼

바닥에 내려앉아 깊이

깊이 자신의 길을 파고 있더란다

여기 있는 내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면

넌 사지가 쪼그라들어 노망이 날 것이라고

안간힘으로 말했노라고

그랬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더니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어도 살 것 같은 기분이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으로

백지에 써 내려간 문장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염병할,

빌어먹을, 천벌받을 글자들이

내 눈으로 들어와 눈을 파먹고

마음을 파먹고 그림자를 파먹다가

사지가 쪼그라든 내가

노망이 들어 사랑을 말했다고 한다

죽어서도 사랑을 말하고

썩어 가면서도 사랑을 말했더니

눈에 박힌 말들이 사방무늬로

울음을 터뜨리더란다

한 줌, 먹물 같은 눈물이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어딘가로 가고 있을 거라 한다

 

박은정, 『밤과 꿈의 뉘앙스』 , 민음사, 2020

 

 


 

박은정 시인

1975년 부산에서 출생. 2011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문학동네, 2015)와 『밤과 꿈의 뉘앙스』(민음사, 202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