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한석호 시인 / 묵티나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5.

한석호 시인 / 묵티나트

 

 

말을 하러 와서 말은 하지 못하고 마음만

얼음의 변방에 내려놓습니다.

바람과 태양만이 황막한 호흡을 더듬어가는

이곳에서 나는 만트라를 외며

물끄러미 세상 밖으로 비켜서 있어야 합니다.

시간조차 읽히지 않는 이곳에서

언어들은 모래바람처럼 산산이 흩어져 증발하고

고산병 환자처럼 숨을 학학거리는

이 아득한 사유는 누군가의 죽음을 읽는 거울입니다.

바람이 나의 말들을 지웁니다.

生의 모든 인연을 경작하는 이들이 거주했던 듯

저기 소금 기둥이 보입니다,

그 아래, 뼈로 쓴 영혼의 말들이 굴러다닙니다.

일찍이 말을 씻고 은둔한 자들과

그 옆에서 마니차를 돌리던 아이의 추위를 돌보기 위해

별들은 늘 어둠 가운데서 눈뜹니다.

꿈의 사원은 설산 너머에 있고

내 사랑은 한 줌 먼지와 내통한 바람의 눈물 가운데서

책을 접습니다.

물고기 떼가 쓸쓸한 바람의 손을 거두어

제 품으로 들이는 시각,

허기와 동거하는 염소 떼가

흙먼지의 손을 둥글게 베어 먹습니다.

흙의 단단한 뿌리,

설탕조각을 입에 문 앵무새의 혀,

마지막 밤을 보낸 나이팅게일의 침묵,

벼랑 끝에 둥지를 튼 붕새,

거룩한 자의 밤은 진리를 꿈꾸는 후투티처럼

눈 밝은 이들이 초를 켜는가 봅니다.

마음을 세우고도 그 발아래 엎드려 우는 것은

흰 눈발의 오늘입니다.

말라버린 계곡의 수로를 따라 운구되는

모래 알갱이들의 장례식,

한 생이 저물 무렵이면

저처럼 계곡엔 사랑을 잃은 말들로 술렁일 것입니다.

온몸 던져 우는 룽다*처럼

계곡에서 산정으로, 산정에서 계곡으로

우우우 소리의 열차를 타고 달리는 사랑을

나는 꿈꿉니다.

동쪽에서 뜬 바람은 북쪽으로 저물고

북쪽에서 저문 바람은 동쪽에서 뜹니다.

물이 타는 곳, 불이 이는 곳,

땅에서 불이 일고 돌에서 불이 일어나는 이곳은

신들의 땅 묵티나트**.

바람과 교감하는 자들의 꿈이 영그는

이곳은 지상에서 마지막 사랑을 읽어야하는 대합실입니다.

 

* 티베트인들이 소망을 적어 걸어놓는 오색 비단 천.

** 해발 3,800m,네팔인들이 살아생전에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불교 성지 묵티나트 사원이 있는 곳.

 

계간 『포엠포엠』 2014년 겨울호 발표

 

 


 

한석호 시인

1958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경희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7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이슬의 지문』(천년의시작, 2013)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