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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화은 시인 / 절반의 입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5.

이화은 시인 / 절반의 입술

 

 

아이 셋을 낳을 때 까지

한 번도 키쓰를 하지 않았다는 그녀

그녀의 남편

토끼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입으로 새끼를 토해낸다는 말을 믿은 적이 있다

그래서 토끼라는 아름이 지어졌다는데

그 말을 아직도 믿고 있는

어린 토끼피 남자일까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오른쪽 젖가슴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어떤 소설 속 주인공이나

뒤를 닦을 때 꼭 왼손만 사용한다는 인도 사람이나

한 가지 용도로만 쓰는 몸

한 가지 용도로는 절대 쓰지 않는 몸

병아리는 오른쪽 눈으로 먹이를 구하고

왼쪽 눈으로는 천적을 살핀다고 한다

남자에게 여자는, 여자에게 남자는 먹이일까

천적일까

여자가 웃고 있다

고층 빌딩 광고판

입술의 절반을 세로로 갈라

다른 색깔의 루즈를 친한

분홍과 보라가 따로 따로 웃고 있다

 

 


 

 

이화은 시인 / 트랙

 

 

여자가 쉐타를 푼다

남자의 뺨을 때리던 오른쪽 팔이 없어졌다

구경하던 왼쪽 팔이 없어졌다

 

잠시 여자가 손을 멈추고 인공 눈물을 넣는다

다시 목을 푼다 목을 꺾듯

 

아직도 붉은 꽃을 가슴에서 풀어낸다

꽃이 사라지자 가슴도 사라졌다

 

마라톤 선수처럼

여자가 달린다 여자를 따라 빙빙 털실이 달린다

 

트랙을 수백 바퀴 돌아도

여자의 눈물을 훔쳐 간 도둑을 잡을 수가 없다

털실 뭉치가 자꾸 커진다

 

쉐타를 다 풀어낸 여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시 눈물을 넣는다

아무도 여자가 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화은 시인

경북 경산 진량에서 출생. 인천교육대학교 및 동국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1991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이 시대의 이별법』과 『절정을 복사하다』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등이 있음. '시와시학상' 수상. 현재 이화은 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