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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성희 시인 / 남쪽에는 슬픔이 따뜻하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5.

김성희 시인 / 남쪽에는 슬픔이 따뜻하다

 

 

며칠 폭설이 내렸다

눈꽃의 방향들로 소멸하는 호칭들

그러나 그리움은 녹지 않은 배경이다

 

하여, 구깃구깃 목적지를 꺼내 드는 사람들

나와 타인의 동시성을 오가던 플랫폼에서

여기와 저기를 떠돌던 고단한 기억을 수화물로 부친 후

어둠이 끝나는 남쪽의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마중 나올 하녀도 고양이도 없는 시적 진실에

달이라도 얼굴을 내밀어 준다면

목가적인 현실의 풍경이 될 것이다

 

굽 높은 구두는 벗어던지고

파도의 변주에 넘실대는 맨발

봉주르, 물방울 속의 작은 기쁨이 넘쳐나는

내내 화사한 인사말로 환해지는 주변

슬픔조차 따뜻하여, 쪽빛 파도가 울지 않는 남쪽

 

 


 

 

김성희 시인 / 비, 너무 많은 느낌표

 

 

떠들어 대듯 쏟아지는 빗줄기는

허공의 테마, 오감을 부풀리는 합창

 

사라진 봄꽃이 내 기분에 관여하듯이

빗소리에 역류하는 먼 시간의 행방을 묻는다

 

일테면 가문비나무에 빗소리가 요란한 것은

들려줄 아이러니가 많다는 게지

 

예를 들면, 비극으로 가득 찬 신들의 미토스

오르페우스의 리라나 프시케의 등불은

힌트 하나 없는 삶에 던져진 의심이다

의심이 가득한 방에서 문이 열리지 않아

신들에게서 온 것은 신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다

 

창문 뒤에 내일은 창문을 열어도 볼 수 없듯이

빗소리는 난감한 삶의 너무 많은 느낌표

신들은 울지 않아, 빗소리가 더욱 요란하다

 

시집 <나는 자주 위험했다>

 

 


 

김성희 시인

부산 출생. 2015년도 계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으로 『나는 자주 위험했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