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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재봉 시인 / 내 등에 꽂힌 칼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6.

하재봉 시인 / 내 등에 꽂힌 칼

 

 

  바람이 너를 데려가리라

 

  내 등에 꽂힌 칼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다.

 

  너의 심장과 너의 콩팥과

  너의 두 눈은 먼지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

  나를 시퍼렇게 바라보리라

 

  너의 머리에는 지금

  돌팔매질을 하기 위해 검은 두건이 씌워지지만

  너의 시체를 묻을 구덩이는 이미 네 곁에 깊게 파여 있지만

  너는 죽어서 살아

  나의 죽음을

  영원히 끝나지 않게 하고 있다.

 

  너를 향한 나의 욕망

  너를 유인했던 그 어두운 폐가의 차가운 돌벽

  너의 옷을 벗기려는 순간

  내 등에 꽂힌 칼

 

  너의 아버지는 네 얼굴에 침을 뱉고

  너의 오빠는 너의 머리를 향해 손바닥보다 더 큰 돌을 던진다.

  마을 남자들이 함께 던지는 돌이 우박처럼 쏟아져도

  너는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참고 있다.

  두건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검은 옷을 물들여도

  너는 쓰러지지 않는다.

 

  네가 내 등에 꽂은 칼은 빠지지 않고

  나를 영원히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죽음에 묶여 있고

  너는 지금부터

  공기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다

 

계간 『시와 표현』 2014년 겨울호 발표

 

 


 

하재봉 시인

1957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 중앙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1년 중편소설로 『문예중앙』 신인상 수상. 저서로는 시집으로 『안개와 불』, 『비디오/천국』, 『발전소』 등과  장편소설 『쿨 째즈』, 『황금동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