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관 시인 / 가을 떡갈나무숲
떡갈나무숲을 걷는다. 떡갈나무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 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혼례, 그 눈부신 날개짓소리 들릴 듯 한데, 텃새만 남아 산 아래 콩밭에 뿌려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는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 같다
떡갈나무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산짐승이 혀로 핥아 보다가, 뒤에 오는 제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 그 순한 산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 조금 따뜻해질 거야, 잎을 떨군다
이준관 시인 / 부엌의 불빛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이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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