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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점용 시인 / 햇볕의 구멍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4.

김점용 시인 / 햇볕의 구멍

 

 

전철 지붕과 공동묘지 지붕이 나란한 곳에 왔습니다?

토요일 오후였으나 갈 곳이 없던 저는

공동묘지로 올라가 무덤 옆에 누웠습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문득 내 옆자리에 누운 풀을 보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누웠다 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도 외롭고 무덤도 외롭고

무덤에 내린 햇볕도 외롭고

문인석도 상석도 외로워 얼어 있었습니다

햇볕과 무덤이 서로를 껴안고 잠들었겠지요

햇볕이 구멍을 열고 무덤을 꺼내 안았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갈 곳이 없습니다

저 멀리 날아가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 내 살림이 담겼습니다

 

 


 

 

김점용 시인 / 스위스 행 비행기

 

 

아내가 울면서 말했다

 

여보, 잘 들어. 악성이고…… 말기래. 아스트로싸이토마(astrocytoma)* 머릿속에 퍼진 것도 2기쯤 된대. 김 교수 말로는 생존율 중앙치가 십삼 점 사 개월인데 표준을 벗어나는 케이스도 많대. 수술하자. 안 하면 육 개월……. 실은 그것도 힘들대.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제발 수술하자 응? 내가 살릴게 꼭 살릴 거야

 

미안해. 안 할 거야. 약속 지켜. 스위스 행 비행기 티켓 끊어줘. 내 통장에 돈 있어. 스위스 가고 싶어

 

나는 지금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다

안전벨트도 없고 기내식도 없고 예쁜 스튜어디스도 없지만

존엄사가 인정되는 삶과 죽음의 중립국

스위스 행 비행기 안에 있다

높고 아득한 공중을 날고 있다

아스트로싸이토마?

내 머릿속에 박힌 무수한 죽음의 별들이

날아가는 내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

그래, 지금까지 너무 한쪽으로만

비대칭으로 살기만 한 거야 영원히 살 것처럼

익룡의 깃털이 비대칭이어서 하늘을 날 수 있었다지만

이렇게 갑자기 날지는 않았겠지

가끔은 적에게 쫓겨 죽은 척도 하고

잠시 잠깐 죽는 연습도 하며

이 무거운 별에서 이륙하기 위해 죽어라 달리다가

덜커덕 죽기도 했겠지

한 마리의 익룡이 하늘을 날기까지 겪었던 무수한 실패와

단 한 번의 성공을

나는 지금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 보고 있는데

모든 별들이 살아 있는 죽음을 나르는 칠성판

영원히 사는 인생이 어딨어

내 머릿속의 별들도 조용히 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혼자서 스스로의 장례를 치르며 두 팔을 활짝 벌리네

 

*별무리 모양의 성상 세포종.

 

 


 

 

김점용 시인 / 모자의 운명

 

 

그는 한쪽으로만 걷는다고 했지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고

한쪽 소리만 듣겠다는 듯

귀가 한 쪽만 뚫린 모자를 쓰고

늘 한쪽으로만 걸어 다닌다고 말이지

그건 편향이 아니야 누구나 다

길 양쪽을 동시에 걸을 순 없으니까

외출할 때 어머니는 꼭

단추를 한 개씩 엇나가게 채웠어

볼 때마다 다시 입혀드려야 했는데

그게 꼭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어

모든 비대칭이 진화를 이끄는 힘이라지만

그렇다고 여당만 찍는 어머니를 진보적이라고 할 순 없자나

네이버 라이버러리에서 사서 몰래 김밥을 먹으며

인체 해부학 책을 오랫동안 들여다 본 적이 있거든

귀 속에는 모자가 있어

달팽이관이 아니야

모자는 원래 귀가 한 개뿐이었던 거야

말하자면 그는 머리 위에 귀를 얹고 다니는 거지

길 양쪽을 동시에 걸을 수 없듯이

두 개의 모자를 동시에 쓸 수는 없으니까

위성안테나처럼 모자는 늘 한쪽으로 삐뚜름한 거지

문제는 말이야 삐뚜름한 그 모자 때문에

그의 걸음걸이도 리드미컬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거 아니겠어

사람들은 그의 걸음걸이 때문에 모자가 삐뚜름해진 거라고

제법 과학적이고 낭만적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내가 본 낡고 두꺼운 해부학 책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어

모자는 먼 곳에서 오는 소리를 듣고

인체 내부기관을 조금씩 바꾼다는 거야

십이지장도 대퇴사두근도 엄지발가락 위치도 심지어 꿈 내용도

아주 미묘하게 조금씩 바꾼대

과천 경마장 가 봤어?

아 상관없어, 말 등에 앉아 박차를 가하는 기수는 봤을테니

말하자면 모자는 그런 거라는 거지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한쪽으로 자꾸자꾸 가는 거

삐뚜름한 모자를 씌우고 그의 기관을 조금씩 바꾸면서

그가 정한 것처럼 보이는 목표점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자꾸자꾸 나아간다는 거지

삐뚜름한 모자 속으로

 

 


 

 

김점용 시인 / 그는 숨는다

 

 

그는 숨는다

장롱 안에도 숨고 마루 밑에도 숨는다

담벼락 속에도 숨고 나무 뒤에도 숨는다

이름에도 숨고 바코드에도 숨는다

한번은 오래된 은수저에서 그가 숨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는 숨는 데 귀신이다 심지어

구멍 난 양말의 오랜 추억 속에도 그는 제 몸을 숨길 줄 안다

동짓달 초이레의 반달 뒤에도 숨고

늙은 여자의 하품 속에도 숨는다

제삿날 병풍 뒤에도 숨고 사진 속에도 숨는다

일부러 보자고 한 적 없지만 그는 날마다 숨는다

햇볕 속에도 숨고 그림자 속에도 숨는다

그의 흔적은 도처에 널려 있으나

그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술래가 되어 그를 찾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

 

 


 

 

김점용 시인 / 입탈(入脫)

 

 

백여덟 번 절하고

부처 훔쳐 내려오는 산길

집으로 가는 길을 지웠네

내 몸을 지웠네

겨울나무들의 마른 이파리를 지웠네

가지와 줄기의 살점도 지웠네

나무들 속살 속 물관만 남겼네

뿌리에서 잎과 꽃 퍼올리던 물관들

금세 하얗게 얼어붙어 반짝였네

능선에 쏟아지는 황금 햇살에 쓸리며

싸르랑 싸르랑 반짝였네

은사시보다 눈부시게

어느 겨울,

그만 쓰러져 죽어버리고 싶었던

소백산 설화보다 더 눈부시게

꼿꼿한 결벽만이 뜨겁게 타올랐네

햇살에 떠밀리는 황홀한 나무들 사이

금빛 나비 한 마리

천천히 날아올랐네

 

 


 

김점용 시인(1965~2021)

1965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 서울시립대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1997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와 『메롱메롱은주』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평론집 『슬픔을 긍정하기까지』를 펴냄. 계간 『문예바다』 편집주간 역임, 2021년 3월 8일 지병으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