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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이랑 시인 /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4.

정이랑 시인 /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나는 남편과 말다툼 끝에 그곳을 나왔다

여자란 결혼하고 나면 갈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버스정류소 앉아 나뭇잎 한 장 주워 잎맥을 살핀다

손바닥의 손금과 흡사한 길들이 선명하다

지나가는 저 사람 또 스쳐가는 이 사람의 길

바라보고 있으려니 정작 나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겠다

횡단보도를 건너 갈 것인가 724번 버스 타고

관음동에 닿으면 가야할 길이 보일 것인가

나뭇잎들도 가야할 길 따라 떠나는 10월,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나는

잠시 결혼한 것을, 아이 낳은 것을, 십년의 세월을

원망하고 억눌러 보지만 소용없이 넘쳐나는 눈물방울들

꺼이꺼이 나를 보고 울고 있는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하다

나는 안다, 골목길 구석구석 그가 찾고 있을 것이란 걸

애타게 걸어가고 있는 발걸음 소리가 보인다, 공벌레처럼

몸을 말아 앉아 있는 나를, 그가 발견해 준다면 좋겠다

인적이 끊기고 버스도 잠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고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남편과 아이가 있는 그곳

전봇대와 나란히 서서 열어놓고 잠들어버린 대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정이랑 시인 / 그립다, 파라나강

 

 

 처음으로 딸집에 오셨다 빈 손으로 올 수 없었던 아버지, 두루말이 휴지를 가슴에 품고 오셨다 초등학교 입학을 시키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는 아버지, 식탁 의자에 이파리처럼 매달려 계신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인해 딸 가슴에 못 박을 뻔 했던 아버지, 이제는 어머니보다 말수가 많아지셨다 기억 속 동구밖을 지키고 있던 떡갈나무 한 그루 같은 아버지, 여행 한 번 같이 간다는 것은 지금도 어렵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배추 몇 포기 가져다주러 오신 아버지, 고향 효천지에서 낚시를 하던 그 날이 그리운 것인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신다

 

 봄 오면 파라나강에 가닿고 싶다 물줄기 하나에 세 나라가 손잡고 살아가는 곳, 그래서 아버지, 나, 나의 아들이 물살처럼 걸어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을 꿈꾸며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는 시간 속에 확실한 것은, 아버지도 나도 파라나강이 될 수 없다는 것, 달 떠오르고 별들 빛나는 밤을 지나서 그 곳에 가닿고 싶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껏 달팽이로 뒤뚱뒤뚱 걸어 왔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흘러가는 것이 강물이라면 파라나강에 가서 한 물살이 되어 흘러가고 싶다 나의 아들이 뒷모습 바라보면서 흘러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돌처럼 앉아서

 

 


 

정이랑 시인

본명 정은희. 1969년 경북 의성 출생. 1997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황금알, 2005)와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문학의전당, 2011)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 『청어』가 있음. 현재 '사림시', '시원'  동인으로 활동. 한국시인협회 회원. 1997년  「한국여성문학상」 수상.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의 해「불교문학상」 시 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