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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림 시인 / 한해살이
탁상 달력을 뜯습니다 꽃들이 울컥울컥 쏟아집니다 한해살이를 끝낸 생명들이 종이 낱장을 붙들고 마지막 제 생을 터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닥에 흩어진 결혼식, 도시가스 검침, 동창회, 정기건강검진, 둘째 생일, 노모의 기제사, 부활절, 클린세탁물 찾는 날, 날, 날들이 빨강, 노랑, 보라꽃을 그득 피워대고 있었던 겁니다
날짜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꽃이었다는 것을 한 해를 다 보내고서야 알았습니다 빈 칸마다 모종들이 쑥쑥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명이 끝난 붉고 노란 꽃들을 누르자 꽃물 든 손바닥에서 눈물처럼 재채기처럼 이야기가 탁탁 터집니다 색이 번져서 어떤 꽃이 봄꽃인지 가을꽃인지 몰라도 좋습니다
한 해가 다 저물도록 꽃이 되지 못한 내가 난쟁이처럼 줄레줄레 따라 갑니다
박해림 시인 / 동굴내시경
나도 모르는 나를 기계가 안다고 한다, 알궁둥이처럼 몇 줄의 진단서를 첨부한 지도가 붉은 선을 따라 명쾌하게 흐르고 있다, 어느 낯선 하천을 따라 흘렀던 열대우림의 흔적인지 아니면 꽉 막혔던 사막의 사유였던지 울혈이 돌부리처럼 간간이 불거져 있다, 의사가 툭툭, 볼펜으로 두드려 편다 내가 거기에 있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그러나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낯익은 데가 없다 왕눈을 부라리고 광촉을 들이미는 순간 달아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으므로 눈 뜨고서도 못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거짓말로 힘껏 고개를 젓고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므로 확인할 용기는 더욱 없으므로 낯선 등짝을 익숙한 등짝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의사에게 볼펜은 참 요긴한 것이어서 팽창과 이완을 지휘한다 볼펜에 꿰뚫린 내가 사막성 기후에 건조된 몸뚱이가 달랑달랑 흔들린다 껍질이 몽땅 벗겨진 궁둥이가 툭 떨어져 뒹굴다가 종이에 접힌다 이렇게 가벼울 수가! 바람이 번쩍 들어 올린 나의 무게…
박해림 시인 / 요실금
씽크대 수도꼭지가 힘주어 아랫도리를 짜내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방광을 열어놓는다 저 부끄러움, 멈출 수 없다
단단히 열려 있다
정신을 놓아버린 뚝뚝 떨어지는 목쉰 함성들 공명의 날들이 데굴데굴 구르며 내 하수관에서 요동치고 있다
채 발라내지 못한 말들 목울대에 걸려 자꾸 고꾸라지고 있다 오래 몸 안에서 삭혀낸 씨앗들 제 중심을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잘난 것들 콸콸 쏟아내던 제 방광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녹슨 말들 바글바글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다
박해림 시인 / 타일
욕탕 바닥이 울퉁불퉁하다 언제부터 그랬던 것일까 발끝에 걸리는 각들이 금방이라도 바퀴를 굴릴 것 같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틈 사이 안구 바깥쪽과 안쪽 그 사이 물에 퉁퉁 분 욕망의 목울대가 불룩하다
허락하지 않았는데 내 속에 들어온 당신 보고 싶지 않았는데 노출된 당신처럼 늘 같은 마음일 거라던 그때의 약속이 틀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앞줄 따라 짜 맞춘 생 내 앞에 걸어간 사람의 등 뒤에 서서 앞에, 그 앞에 놓인 줄을 따라 끊임없이 걸어가야 했던 축축한 타일의 날들
허기에 퉁퉁 불어터진 각이 하수구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있다
박해림 시인 / 발
과일을 받쳐 든 소쿠리가 두 다리로 서 있다 다리 세 개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도 모르고 발끝에 힘을 주고 있다 저 직립, 빈곳도 팽팽할 수 있다니
온몸으로 기어가는 시장 바닥의 저 사내 바닥과 구분되지 않는 직립의 생을 가졌다 허리를 굽혀 겸손히 떼어내는 발이 바닥을 밀어내고 또 끌어올릴 때 비어 있는 다리의 힘으로도 추락하는 내가 버틸 수 있는 것인지
소쿠리 한쪽이 비워지면서 텅 빈 모서리가 공중을 번쩍 들어올린다 생의 한쪽이 좌르르 쏟아지고 있다
박해림 시인 / 적멸
적멸보궁에 가서 적멸을 보았다고 너는 말하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한다
적멸 앞에 서서 적멸을 보려 몇 겹의 산을 돌고 지방도와 국도를 달려간다 길이를 가진 것들의 등줄기를 뛰어넘고 깊이를 가진 협곡을 내달린다 무욕의 마음을 깔아놓은 비포장도로를 걷고 또 걷는다
첩첩 산 속의 적멸이라니!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첩첩의 말들이 빠르게 둘레를 치고 가지를 뻗을 동안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을 탁, 손아귀를 빠져 달아나는 소리라니!
뒤돌아본 산등성이가 꿈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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