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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용진 시인(마산) / 심해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5.

박용진 시인(마산) / 심해어

 

 

물방울 속에

물방울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네가 태어났다

 

가만히 몸을 말고 있던

가만히 착하게 사랑하고 있던

 

내 딸이며 누이이며 아내이며

내 투명한 고향

 

비도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결도 없는 물방울 속에

오로지 우리 둘만 있어

 

네 손끝에서 피어나던 꽃

내 손끝에서 터져 나가던 꽃

 

배 속에 알이 가득 차 있었다!

 

~ 시집 <미궁> 중에서~

 

 


 

 

박용진 시인(마산) / 화진여관

 

 

그곳의 이름은 화진여관. 그녀가 그토록 들고 싶어 했던 곳이다. 강철로 가득한 거리. 늘 비가 내리던 거리. 거기에 그 여관이 있었다. 거리의 시작 아니면 끝이었을 길에 자리 잡은 낡아 빠진 여관. 누군가는 목을 매고 자살한 이 층 여관. 간판이 깜빡거리는 여관.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햇볕은 아늑하고 가로수들은 푸르렀지만.

 

거기에 그 여관이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 들어서는 것을 무서워했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설 수 있는 좁은 입구를 무서워했다. 그 앞에 놓인 가파르고 조잡한 시멘트 계단을 무서워했다. 조도 낮은 형광등 아래 놓인 숙박계를 무서워했다.

 

낙원에서 온 수많은 이름들이 거기 있었다. 불량형의 아침, 아니면 저녁마다 창밖의 불빛을 손톱으로 건드려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인 삶들, 강철의 시작 혹은 마지막이었을 이름들. 그녀의 이름 위로 걷고 있었다. 같잖게. 같잖게. 중얼거리며. 거기에 그 여관이 있었다.

 

어두운 복도. 문. 문. 문. 문. 어항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그 여관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갔으니까. 그곳이 이화장이었든 화산장이었든 결국에는 화진여관이었을 그곳에 우리는 들어갔으니까. 모든 것이 너무나 단단했고, 제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때였으니까.

 

문.

 

다시 거리에 서면 햇볕은 아늑하고 가로수는 푸르렀던

 

낙원. 우리는 그곳에 들어갔으니까.

 

사라진다. 냉동육의 태양이 이글거린다. 강철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강철의 살갗 위로 강철의 뼈가 돋아난다. 온몸의 구멍에서 강철의 혈관이 쏟아져 나온다. 절삭되고 깨져 나가고 산화되어 가고 있는 강철의 내부, 넘어설 수 없는,

 

 


 

 

박용진 시인(마산) / 그림자의 주인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소리를 지른 적이 없는 것이어서 그녀의 정원에서는 아기의 눈동자처럼 초롱초롱한 개울이 흐르고 사나흘 지난 시신의 가죽처럼 푸르딩딩한 풀들이 자라나요 태양은 창백한데 그럴 만도 한 것이 종종 그림자들이 퍼덕이며 날아가 잠든 태양의 그림자에 붙어 피를 빠는 것이 보이곤 했던 것이고 그때마다 불붙은 그림자들이 떨어져 내려 온 마을이 난리가 나곤 했던 것이지요 마을의 오랜 풍습에 따라 시체 버리는 숲을 지나면 참 좋은 향기가 풍겨 오는 이 세상 아닌 것 같은 예쁜 곳이 있는데 거기가 그녀의 정원이고 어머니들은 그곳에 가지 못하게 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큰 어머니가 있는 곳이라 우리 소녀들은 절대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된다 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곧잘 그 앞에 가서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고 돌로 이마빡을 깨뜨리고 나뭇가지 채찍으로 등짝을 후리고 하며 피가 터질 때까지 놀았는데 그래도 겁을 먹고 어머니 말씀을 지켰던 것이라 지금도 이다음에 커서도 사랑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그 안에 들어간 적은 없어요 우리가 들어온 어머니들의 노래에 따르면 세상에서 제일 큰 어머니의 정원에 들어서면 천하게 아리땁고 환하고 또 쓸쓸한 그녀가 당신을 보는 것이고 당신은 어째서인지 제 몸에서 원숭이 손바닥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부끄러워지고 어떤 처절한 균열 같은 것이 척추에서부터 일어난 것처럼 으르렁거리고 그래서 그녀의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어 물어뜯고 으르렁거리고 그러다가 또 그것에 존경을 표하고 울부짖고 예배를 올리고 으르렁거리고 하다 마침내 그것을 때리고 또 때려서 죽이게 된다지요 그러고는 가슴이 찢어진다며 슬퍼하다가 하늘을 보면 그림자들이 그 날카로운 송곳니로 내놓은 구멍 사이에서 물고기 같은 별빛이 쏟아져 위안을 얻고 정말로 찢어진 가슴에서 심장을 꺼내 정원에 묻어 두고 떠나면 저승에서 이승으로 와 닿는 노랫소리처럼 또 풀들이 자라나고 그림자들이 일어나 물을 주는데 방금 다녀간 당신의 그림자도 갓 자른 탯줄처럼 아직은 싱싱하게 일어나 일한다지요 이들을 바라보는 안개 몇 꺼풀을 씌워 놓은 듯한 그녀의 눈빛과 가지런한 치아는 악몽처럼 친절한 것이어서 그림자에서 태어났다는 그녀의 그림자와 완벽한 미궁 같은 혈관은 마지막 장이 찢겨 나가 결말이 궁금한 소설 같아요 그래서 당신은 또다시 그녀를 찾아오고 만대요 심장을 뜯어낸 자리에 오만칠천 삼백삼십 개 알들을 품고 온대요 다 찢어진 당신은 으르렁거리고 그녀의 그림자를 물어뜯으려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듯 당신을 밀쳐 내고 마는 것이고 그러면 찌그러진 채 녹슬어 가던 당신의 가슴에서 알을 깨고 조그맣고 귀여운 그녀들이 꼬물꼬물 기어 나와요 울지 않아요 아직도 슬퍼하는 당신 구겨진 당신을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노래하며 근엄하게 당신의 모성을 먹어 치우고 사랑으로 충만해진 그녀들은 또 어딘가로 떠나가는 것이겠지요 그림자는 지금도 우리 발아래에 붙어 있는 것이어서 우리를 놀라게 하곤 하는 것이지만

 

 


 

박용진 시인(마산)

1982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 2006년 《서정시학》 여름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미궁>. 현재 서울에서 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