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솔 시인 / 수국
차오르는 빛깔을 바라보네 꽃망울마다 빛이 넘치고 있어 초록에 하얀색이 고이더니 하늘빛이 고이고, 다시 분홍빛이 고이고 빛깔은 테두리를 둘러 안쪽으로 흘러가고
꽃이 색을 입는 순간은 고요해라 떠날 때처럼 다시 와서 고이는 빛깔들 꽃이 문을 열자 빛이 들어오고 하늘색, 분홍색, 보라색이 스미네
수국이여, 내 것을 버림으로 풍성해진 꽃 나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버릴 때 오묘한 빛깔이 사방에서 밀려오네
하늘을 닮은, 태양을 닮은 수국이여 홀로 부는 바람에도 그리움으로 안부를 묻는다
떠나간 것들이 모두 돌아오는데 헤어진 것들이 두 손을 내미는데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떠난 너는 왜 돌아오지 않는지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어 네가 서성이던 마당을 보고 있어 함께 바라보던 수평선을 보고서 수국으로 피어나렴
달빛을 보며 글썽이는 눈동자 초록의 눈망울이 어느새 하늘빛으로 물들고 분홍빛으로 어른대고, 보랏빛으로 서성이는데 네가 언제 올지 몰라 빈 뜰만 서성이네
박현솔 시인 / 물의 비검을 휘두르다
그곳의 상류에는 물이 시작된 흔적이 있다 돌멩이가 바람에 눈을 뜨고 물줄기가 햇볕에 나뒹굴고 가는 맥이 한 땀씩 뛰는 동안 길을 터주는 땅의 축원 힘없는 물줄기는 색이 바랜 잎사귀를 들추고 시간의 둘레를 둥글게 더듬으면서 흘러간다 두려움을 잊어야 그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지 아직은 큰 물길을 거느리지 못했지만 물의 자손으로 태어나 어길 수 없는 율법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 지친 새들의 날개를 적셔주고, 은신처가 되어주고 쫓기듯 걸어온 길들의 마른 목을 축여주며 큰 물길로 가는 도량과 넉넉함을 수행하는 것 부피가 조금 늘어난 물줄기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어린 물의 험난한 도정이 망망대해를 향해 흘러간다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어린 물의 순례는 큰 바다를 만나야 완성된다 경사진 곡벽에서 무수히 떠도는 물의 위협을 받고 어느 협곡에선 물의 비검을 휘두르는 소용돌이의 시간들 물길을 내는 것은 어린 물 자신이어야 한다 물에 비친 눈빛이 두려움을 벗고 예지로 빛날 때 험난한 도정의 끝에 비로소 큰 바다가 보인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용진 시인(마산) / 심해어 외 2편 (0) | 2022.05.05 |
|---|---|
| 김성대 시인 / 둘째 주에 온 사람 외 2편 (0) | 2022.05.05 |
| 이하 시인 / 기억의 무게 (0) | 2022.05.05 |
| 김석환 시인 / 여인숙에서 일박하다 외 3편 (0) | 2022.05.05 |
| 이현경 시인 / 자전거의 수식어 외 1편 (0) | 2022.05.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