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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 시인 / 기억의 무게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5.

이하 시인 / 기억의 무게

 

 

빈집은 이름을 얻지 못한 풀들이 지천이다

문을 열자 낯선 바람이 함께 들어섰다

대밭에 불던 바람은 무관한 이웃처럼 지나갔다

허물을 벗어놓고 떠난 집

오랜 세월을 쌓아온 서랍을 훔치듯 열어본다

푸른 봄날이나 한때 여름 잎새처럼

성성한 날들이 만들었을

털실 원피스의 마른 얼굴을 만지며

어류처럼 누웠던 그녀 숨결과

부피 가볍던 시간을 생각한다

아내의 두 눈은 분홍 꽃잎의 강물 속으로 빠져든다

 

비바람에 다 지워졌으리라 여겼지만

올 빠진 날개를 감춰둔 서랍 안에선

기억의 무게들이 차곡히 펼쳐진 채

빈 어둠을 지키고 있었다

 

등 두드리는 봄 햇살

그 따스한 손길을 받은 아내는

고개를 떨구고 어깨는 오래 들썩였다

 

봄비가 내려 꽃 진 뜰 한 켠에

지난해 보이지 않던 수선화

여린 꽃을 피우며 홀로 서 있다

 

봄날 풍경이 어스름에 지고

달빛은 분홍 꽃잎이 남겨진 뜰 위에서

긴 밤을 홀로 춤추고 있다.

 

봄날 풍경이 어스름에 지고

달빛은 분홍 꽃잎이 남겨진 뜰 위에서

긴 밤을 홀로 춤추고 있다

 

서랍을 닫자

레퀴엠처럼 긴 여운의 바람이 다시 멈추었다

고요의 기억을 감춘 빈집은

무게를 잃은 어둠의 영역으로 다시 아득해졌다

 

웹진 시인광장』(2021년 5월호)

 

 


 

이하(李下) 시인

본명 : 이창호(李昌浩), 경북 울진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2021년 웹진 『시인광장』 제10회 신인상을 톰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