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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석환 시인 / 여인숙에서 일박하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5.

김석환 시인 / 여인숙에서 일박하다

 

 

굳게 닫힌 山門, 밖 여인숙에서

늦도록 화투판을 벌인다

앙상한 잡목 가지 끝마다 보름달

입술을 대고 음정을 고르는 밤

연거푸 설사하고 皮박 光박에

끝내 거덜이 나자 어둠 속에 눕는다

쓰러진 빈 소주병 속으로

고여 오는 팬파이프* 소리

구덩이에 쓸려가 잠든 가랑잎이

가끔씩 깨어나 바스락거린다

알맹이 껍데기 가리지 않고 마구

패대기친 화투장처럼 살해된

시간들이여, 깊이 잠들어라

나무들이 알몸으로 제 키만큼

제 슬픔만큼 울어 시린 하늘 가득

별자리를 수놓고 있는데

새벽이 오면 움켜쥔 패를 다 털고

빈 지갑으로 먼 길을 가야 하는데

 

* 팬파이프(panpipe) : 길이가 다른 관을 다발로 묶거나 일렬로 배열해 고정시킨 관악기로서 판의 피리라고도 한다. 관의 한쪽은 대개 막혀 있으나 뚫린 것도 있는데, 대나무,갈대,나무,점토,금속 등의 재질로 되어 있다. 관의 길이에 따라 음의 높이가 정해지므로 지공(指孔)이 있는 관악기보다 비교적 음정이 정확하다

 

 


 

 

김석환 시인 / 습관

 

 

고흐네 해바라기 밭에 들어가 서성대다가 몰래

종지기 아동문학가 권정생

비좁은 사택, 댓돌 위 낡은 신발이나

신어보다가, 변방지기 두보 씨 높은 망대를 기웃거리다

밤늦게 귀가하다

 

도둑고양이 눈에 푸른 불 켜고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소리, 앗!

현금도 카드도 신분증도 운전면허증도 영수증도

열쇠꾸러미도 명함도 모두 무사하구나

 

아파트 옥상 위 어둠 속에서

3등성 좀별들 푸른 불 켜고

내 호주머니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무엇을 훔치러 왔다 갔느냐고

정말 무사하냐고

 

 


 

 

김석환 시인 / 항아리

 

 

돌을 던져 주오

물과 불로 내 살을, 뼈를 빚던

그 능숙한 손길로

나를 깨뜨려 주오

채울수록, 비울수록

더 깊어지는 허기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지병을

가시게 해 주오

외진 골목 끝 담장 안에 던져진

몸, 몸의 질량이 덫이 되어

날지도 꺼지지도 못하는

숙명을 가두어 주오

시린 가슴 보슬보슬 쓸어 주던 봄비도

만 길 외로움으로 차오르는 걸

수심 밑바닥에 잠긴 달도

끝내 뼈까지 삭고 삭아

눈 먼 회오리바람이 되어

나무숲을 헤매다 되돌아오는 천연동굴

 

 


 

 

김석환 시인 / 소머리곰탕집에서

 

 

수락산 등산로 입구 낡은 집 벽시계는 늘 멈추어 있더라.

노송 한 그루 제 그림자를 지키고 서 있는 뒷마당,

무쇠 가마솥 가득 죽은 시간이 설설 소머리 잡뼈 육수를 우려낸다.

외로운 누구의 묘비인가.

소머리 곰탕 전문,

간판을 지우며 내리는 함박눈.

뿔을 세우고 멍에를 메고 걸어 온 길이,

갈고 갈던 비탈밭 이랑이,

선혈을 토하고 쓰러진 칸나 꽃대가 묻히고.

오래 고아야 제 맛이 난다나.

가마솥 아궁이 장작불에 활활 풀무질을 하는

노파의 시린 손목을 보듬으며 내리는 함박눈.

가죽도 살도 다 벗고,

가끔씩 스스로 뒤척이는 소머리,

지그시 감은 눈,

뼈 속 깊이 박힌 미립자마저 우려내는 저녁 어스름

 

길손아, 잠시 무거운 여장을 풀고

모든 길이 끝나고 새로 길이 열리는

외진 길목, 소머리 곰탕집 식탁에 앉아 보자

수락산 숲 그늘, 어느 암자의 종소리보다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의 침묵보다

더 깊고 진한 한 뚝배기 곰탕

수저를 담그고 창밖을 보자

아, 노송 푸른 가지에 만발하는 눈꽃

가볍게 승천하는 장작불 연기

 

 


 

김석환 시인

충북 영동 출생.  한남대 국교과 졸업. 명지대 국문과 박사학위. 1981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및 1986년 《시문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심천에서』,  『서울 민들레』, 『참나무의 영가』, 『어느 클라리넷 주자의 오후』 등이 있음.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