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영숙 시인 / 가을의 연가(戀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5.

정영숙 시인 / 가을의 연가(戀歌)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들을

몹시 그리워하는 가을이 왔네

 

단풍의 하모니와 낙엽의

눈물이 교차되면서

지나간 추억 속에서 보고픈 이들을

가슴 깊이 떠올리는 이 가을이 왔네

 

그 옛날 즐겨 들었던 노랫소리와

진한 커피 향기가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시간... 이 가을이 왔네

 

풍요로운 수확을 보면서

남은 한 해 동안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시간...

이가을이 왔네

 

아마도 모두가 이 가을을 사랑할 거야...

 

 


 

 

정영숙 시인 / 사랑

 

 

그대 어찌하여 빈 낚싯줄만 드리우고 있는가

미끈한 낚싯대를 물 위에 얹어놓고

물방개가 그리는

물이랑의 동심원 속에서만 흔들리고 싶은건가

낚시란

물고기와 한 몸이 되어

물을 차오르는 비상을 함께 느끼는

햇빛을 가르며 함께 창공을 날아오르는

그 허공 속에 곤두박질치며 칼날처럼 빤짝이는 비늘을 날리는

서로의 몸 속 깊이 파고 든 독으로 함께 죽어가는

그리하여 정오의 수면 위 붉디 붉은 연꽃을 피워내는 일이 아니던가

 

 


 

 

정영숙 시인 / 佛頭片

 

 

천불산 계곡아래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대가리만 남은 불상을 본 후

내 몸이 사라졌다

얼마나 큰 대역죄를 지었기에

모가지가 댕강 잘려진채

천년동안 저렇게 모진 형벌을 받고 있는건가

코와 눈은 문둥병 환자처럼 형체도 없이 뭉그러지고

팥고물처럼 겨우 달라붙은 입마저

연산홍 꽃빛에 어려 보이지 않는다

발 아래 뒹굴고 있는 머리만 남은 불상을 보며

나는 나를 낮추어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몸이 사라진 내 눈 속에는 그의 머리만 가득하다

산정상에 다정히 누워계시는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상을 밤에 몰래 문구멍으로 훔쳐보며

남의 서방을 탐한 죄

내 큰 죄로 새 세상을 일으킬 존엄한 두 불상을

천년동안 천불산 계곡에 누워있게 하지 않았던가

내 몸에 피어있는 연산홍빛 붉은 죄들

운주사 초입에서부터 내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더니

대웅전 무릎 꿇기 전에

내 몸둥아리마저 사라지고 없다

내가 바로 불두편이다

 

 


 

 

정영숙 시인 / 병술년, 폭설

 

 

박 속에 갇힌 기막힌, 귀가 막힌 한 여자를 본다

무색의 막막한 속, 끈끈한 액질 속에 허우적대는

한 뼘의 간격조차 없는 곳에 누워있는 저 여자

사방 팔방 둘러보아도 길은 없다

새파란 싹을 달고 푸른 하늘 마시며

사통팔달 길을 내며 달리던 날 있었던가

풍경 소리 내며 달리던 은빛 바퀴살

구릉을 넘어 구름빛 서산에 걸리지 않았던가

파도를 타고 하늘로 치솟던 흰빛 상어

포물선 그리며 갈채 속에 곡예를 하던

천지를 울리던 소리 소리들

누군가 한숨에 다 삼켜버렸다

누군가 시샘하여 내 사랑 다 묻어버렸다

하늘인가 땅인가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무덤에 누워

무색의 어둠 속, 무욕의 날을 갈고 있는

무위(無爲)에 갇힌 저 기(귀)막힌 여자

말문이 막혀 먹통이 된 여자

 

 


 

정영숙(鄭英淑) 시인

경북 대구에서 출생. 가톨릭대 영문과 졸업, 1993년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으로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지상의 한 잎 사랑』, 『물 속의 사원』, 『옹딘느의 집』, 『하늘새』, 『황금 서랍 읽는 법』 볼레로, 『장미빛 문장』  등과 명화산문집 『여자들이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이 있음. 2001년 문예진흥 기금 수혜. 2012년 목포문학상, 2015년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여성문학회 회원, 한국카톨릭문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