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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광호 시인 / 나의 파쇄기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7.

김광호 시인 / 나의 파쇄기

 

 

‘의미 있는 문서는 반드시 파쇄를 하세요.’

 

종이에 손가락이 베인다

 

종이에 번진 핏자국도 소중한 개인정보라고 들었어

 

한 방울의 피와 지문이 묻은 지면들

 

그것은 함부로 버리면 안 되는 문서가 되고

그것은 파쇄되지 않게 간직하고 싶은 문장이 되기도 하고

 

그것은 죄였을까.

 

피 묻은 지면 위에서 파쇄된 문장들. 그것이 나를 옥죄였어. 내가 찾지 못하고 내가 찢어버릴 수 없도록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만든 서랍에 나를 숨겼어. 내가 죄였어.

 

유리창을 파쇄하려고 기계 같은 비는 내리나

 

서랍을 열면 커터칼처럼 들어 있는 빗줄기들, 밑에는 찢어진 가로등 불빛들, 밑에는 찢어진 불빛으로 털을 빗는 길고양이

 

내일은 털을 몽땅 자를 거야

헤어볼로 죽은 고양이를 끌어안으면서

 

오래전에 쓴 일기를 오래 읽지 않는 이유

 

파쇄기에 찢긴 문장들이 몸속에 가득 차면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마당에 깔린 파쇄석은

한때 누구의 토르소였을까

 

마당에 깔린 파쇄석은 무거운 발자국으로 인해

아직도 파쇄의 역사를 갖고

 

더는 작동하지 않는 마당이 있다,

소문으로 들었어

 

의미 없는 잔해와 고장으로 난 일기로 가득 찬

 

나의 파쇄기를 보내며

 

계간 『한국시학』 2021년 겨울호 발표

 

 


 

김광호 시인

1984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 경인교육대학교 졸업. 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받음. 2020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현재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 초등학교 교사, 글발시인축구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