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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임백 시인 / 억새와 어머니
석양이 제 옷고름 풀어헤칠 무렵 언덕에 핀 억새꽃을 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옷깃을 여몄지만 쉼 없이 달라붙는 성가심에 울컥 목 놓아 울음을 토한다 방황하듯 중심 잃은 은색의 군락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저 가냘픈 몸짓 비바람에도 견디는 법을 터득했을까? 머리털이 하얗도록 모진 세월 견디셨던 어머니 생가슴 앓으며 속을 비워낸 어머니 가슴에도 눈물의 해일이 일어났다 자식들 위해 바람과 맞섰던 세월 주름진 삶에 붉은 노을이 지고 삭을 대로 삭아 쪼그라진 어머니의 가슴에 바람마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다 이제, 허리 굽은 채 침묵의 심지 돋우시는 노을에 물든 억새꽃 당신 조용히 멀어지는 계절 모퉁이에서 거칠어진 숨 고르며 기인 사색(思索)에 잠기신다.
김임백 시인 / 녹차
사위어든 찻잎들이 뜨거운 물에 잠겨 잊어버렸던 지난날의 향기롭고 푸르른 기억들을 서서히 풀어낸다.
차분한 기다림 후 비취색 인내가 한 잔 가득 고이면 주위를 휘감는 은은한 향기 따스함으로 온몸을 감싸 안는 오묘한 맛을 느낀다.
생의 고달픔 속에서 움츠려든 많은 사람들 그들의 젊은 꿈은 또한 얼마나 싱그러웠던가.
약속 없이도 기다릴 줄 아는 차분함속에서 향기로움으로 세상을 적셔줄 그대가 그립다.
김임백 시인 / 호주머니
네 속에는 거스름돈이며 집 열쇠, 영수증.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불룩하구나.
찬바람 부는 날 장갑 없이도 꽁꽁 얼어붙은 손 품어주는 따스함도 가졌구나.
너는 내 구질구질한 생의 잡다한 상념들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친구
다시 꺼내보고 정리할 여유를 주는 너의 따스한 품이 넉넉하고 깊었으면 좋겠다.
김임백 시인 / 수제비 먹던 날에
보슬비 내리는 날 밀가루 풀어 반죽을 한다 물을 섞어 저어보지만 쉬이 밀착되지 않으려 풀풀 날리는 가루 긴 시간 치대고 나서야 차지게 엉겨 붙는다 밀가루 반죽이 그러하듯 사람사이의 관계도 매만져야 한다 제각각 다르게 살아온 삶 흐트러지는 마음들 둥글게 얇게 밀어 올려 한 덩어리 되면 따뜻한 수제비 한 그릇 되겠지 서걱거리며 구부러지고 휘어진 통하지 못한 언어들 물고를 트고 가슴 열어 껴안으며 포만(飽滿)의 노래를 부를 일이다.
김임백 시인 / 해질 무렵
서산의 붉은 노을엔 나의 유년(幼年)이 묻어 있다 이집 저집 저녁밥 짓느라 매캐한 연기 꽃 필 무렵 머리엔 푸성귀 한 광주리이고 손에는 호미자루에 지친 몸 이끄시던 어머니 들일 나간 아버지의 하루도 곤함을 달래는 시간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구수한 자장가 따라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서산에 해 그림자 길게 누울 무렵이면 노을 사이로 소리 없이 일어서는 내 인생의 이정표가 보인다 온몸을 불살라 스스로 농익는 노을처럼 내 삶의 경영도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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