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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재남 시인 / 감상적인 독서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7.

강재남 시인 / 감상적인 독서법

 

 

목소리를 파먹는 빌어먹을 노파로군

 

모란문양 책장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향기가 없다는 건 무례한 해석이다

 

금병매는 우화였고 홍루몽은 변명이었다 나비의 행적은 수소문하지 말자 오래된 글자가 나비의 방식으로 흩어진다

 

변명과 우화를 바꾸어 쓴다

 

노파의 목소리는 푸르고 빛나는 늪이다 아직 쓰지 못한 좋은 구름과 높고 쓸쓸한 사람, 저무는 날과 깨어있는 아침, 일차원으로 가는 길은 순결한 서정이 빼곡하다

 

다른 말은 절벽이야

 

모란앵무가 중얼거렸다 앞말을 잃은 앵무새는 뒷말에 능통했다 비밀이 많아 말의 감옥에 갇힌 노파를 닮았다

 

우화와 변명은 모른 척하는 게 좋겠다 말줄임표는 왜곡하면 그만이다 근사한 변명으로 꽃이 피겠지 여름이 가까이 있을 테고

 

우화가 뜬구름이었다는 건 눈감아 줘야지 습한 마음에 기대 사는 게 노파의 원작이니까

 

말과 말이 어긋나는 지점에서 구름은 느리고 비는 내리고

 

순결한과 서정과 은폐된 목소리 높고 쓸쓸한 사람 빌어먹을 노파 고서에는 행간을 이탈한 생각이 생각을 붙잡고 뒤엉켜 있었다

 

 


 

 

강재남 시인 / 기껏해야 거울이거나

거울의 다른 이름이거나

 

 

몽상의 숲에 목소리를 잃은 물고기가 산다는데

 

숲은 경솔한 물방울을 모아둔다 오목하게 파이는 물고기 퇴화한 아가미를 가진 너에게 회화적인 이름을 지어준다

 

거짓말이 고개를 든다 제 색을 펼치지 못한 유월은 허언을 앓는다

한낮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도 계절을 따라가다 헐거운 문장을 만나더라도

 

잔잔한 수면을 거울이라 부르면 좋겠어 물고기에게 목소리를 주면 좋겠어 꼬리를 움직일 때마다 유순한 쉼표를 그리면 좋겠어

 

때때로 거울에 네가 일렁이는 건 물고기에게 그리운 감정을 먹이로 던지기 때문

몽상의 숲에 고인 거울을 깨야할까

 

거울의 감정은 파란 잉크와 종이비늘물고기

모스부호로 흩어지는 말이 쉼표를 건넌다

 

유월은 서쪽으로 가는 거야 묘연한 숲에선 거짓말이 자라거든

 

거울의 근황이 엷어진다 거울에서 네가 보인다

왼쪽은 왼쪽으로 그리하여 좀 더 서쪽으로 기우는 너, 너를 왜곡하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강재남 시인

경남 통영에서 출생. 2010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과『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가 있음. 한국문화예술유망작가창작지원금 수혜. 한국동서문학작품상, 동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