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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점미 시인 / 반성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6.

김점미 시인 / 반성

 

 

그림을 그린다

쓸쓸한 뒷모습에 고정시킨 눈,

그리기에 몰두한 채

너무 많은 선과 면을 그렸다

한발 물러서서

그림을 바라본다

너무 많은 선과 면이 부담스럽다

담담히 돌아서서 하나씩 지운다

흔적만 남았다

흔적만 남은 그림을 벽에 건다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그림을 바라본다

다시 담담히 돌아서서

그림 밖으로 나온다

그림 주변에 선 나도 지운다

흔적 속의 나는

편안하다

 

시집 〈한 시간 후, 세상은〉(2013) 중에서-

 

 


 

 

김점미 시인 / 시작법(詩作法)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것이 사랑시밖에 없다면 나는 손가락이 해지도록 쓸 것이다 쓰다가 쓰다가 내 손목이 떨어져 나가도 혀끝에 감도는 그 낱말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길고도 긴 기다림의 끝에 매달려 살아온 시간의 빈방이 다 차도록 쓰고 또 쓸 것이다 내 주변의 공기가 다 녹아내리도록 뜨겁게 달군 펜으로 남아 있는 한 장의 종이가 다 타버릴 때까지 나는 쓰고 또 쓸 것이다 쓸데없는 유예의 강에서 모든 물을 뽑아 버릴 것이다 그래서 흐르다 흐르다 지친 눈물의 소망을 들어줄 것이다 잿더미가 된 내 육체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그대를 위해 잠시 나의 역사를 멈추어 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정지된 채 아래로 아래로 흐를 것이고 흐르다 지치면 깊디깊은 어둠의 땅을 덮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대의 찬란한 눈동자 속에 다 녹아버린 것이다

 

 


 

김점미 시인

부산 출생. 부산대 독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국해양대 유럽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2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 『한 시간 후 세상은』 (2014 도서출판 북인). 부산작가회 회원, 시인축구단 글발 회원.. ‘글발’ 공동시집 『사랑을 말하다』(2005년),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2012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