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이정 시인 / 외뿔고래별자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7.

박이정 시인 / 외뿔고래별자리

 

 

해 뜰 무렵 받아 안은 새소리를 몸에 새기며

오늘의 담허리를 기어오르는 나팔꽃

쓰레기더미에서 삐쳐 나온 유리조각에

청비단꽃잎이 찢겨있다

바람 한 줄기에도 죄목을 붙이는 시대

나팔꽃 이름을 손에 쥐고

서해로 지는 해 바라보면

손가락 마디마다 상처를 매달고

벽이 태어난다

바지랑대 휘감는 우리는

벽을 삼키는 방식으로 지저귀는 꽃

회색담 기어오르다 헛디던 바람은 차라리

즐거운 날개

불확실한 나를 버릴 때까지

꽃은 넝쿨의 선율로 말하고 있다

나팔꽃 씨앗처럼 새까만 뱃속에서

움트려는 목소리, 환청처럼

햇빛, 목마르다

쓰레기 썩는 냄새 진동하는 막다른 현장에 떨어진

씨앗 하나

바다 밑 청비단 배를 들어 올려

유리조각 박힌 하늘에 띄워놓는다

 

오늘 밤에도 외뿔돌고래가 검은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

 

ㅡ시집 <나비를 이루는 말들> (시산맥, 2009)

 

 


 

 

박이정 시인 / 북두칠성의 여자

 

 

길쭉한 손잡이 달린 창가

흙으로 빚은 화분에

꺾인 잎

말라가는 잎

먼지 앉은 잎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사선으로 잘린 잎

검게 타들어가는 잎

누렇게 뜬 잎

벽에 기댄 잎

어느 잎 하나 서로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말없는 화분

얽히고설킨 사연을 끌어안고

귀 기울이다가

소한과 대한 사이 이른 아침

꽃대궁 하나 뿌리에서 쑤욱 올려

봉오리 확 터트린다

온 우주에 난향 그윽하다

 

삐친 난촉들 서로에게 빛을 쏜다

 

북극성에서 허벅지에 힘 꽉 주고 두 팔 벌려

일곱별을 돌리는

관음소심.觀.音.素.心.

 

 


 

 

박이정 시인 / 탯집

 

 

콧봉오리에서 입술 쪽으로 난 아버지의 검은 주름을 따라간다

 

주름진 막장을 따라 들어가면

거기,

이억 오천만 년 된 동굴에서

도시락 뚜껑을 여는 젊은 아버지

새하얀 이빨

석탄가루 곱게 뒤집어 쓴 흰쌀밥

 

한 톨의 쌀눈에서

진폐증 앓는 아이가 걸어나와

무덤가에 떨어진 별똥별을 주워 책가방에 넣고

동점초등학교 교실 문을 드륵- 연다

구문소 물보라 타고 나팔고개 넘어 간다

 

태백에 눈 내린다

하얀 하늘

하얀 산

하얀 기차

하얀 땅

하얀 냇물

 

하얀색을 끝내 이기지 못한 철암역이 부르르 떤다

 

싸릿재를 넘지 못하고 하얗게 갇혀있다

 

벽에 걸린 흑백의 동굴 속으로 빛바랜 석탄차가 들어간다

 

 


 

 

박이정 시인 / 새

 

 

노을 껍질을 밟았다

문지방에 떨어진 붉은 조각이 바-스-락-

복숭아뼈 근처 허공에서 정강이쯤의 허공으로

소리가 날아오른다

날갯짓인가

깃털처럼 가벼워진

간유리로 기어들어온 햇살을 쪼고 있다

굵고 흰 수염뿌리

관절염으로 툭 툭 불거진 손가락

어둑한 부엌 귀퉁이 여기 저기 흩어진 노을을 따라

눈물 쏙 빼는 매운 향

어디까지 날아갔을까

 

백옥피부에 검버섯 피고 지고 물컹물컹

짓물러터진 시간 속에

달랑 남은

양파

 

뽀송송 밀어올린

초록 부리

 

알을 깨고 나오는

 

 


 

박이정 시인

2006년 《다층》으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민족문학연구회 회원. <시산맥> 특별회원. 시향동인, 다층동인, 한국하이퍼시클럽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