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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석 시인 / 저물녘 당신
제철소에서 뻘겋게 타는 쇳덩이만 보면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다 가고
꽃이 피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당신이 떠났다는 소문이 찾아오고 뻘겋게 뻘겋게 타는 쇳덩이만 보면서 납작하게 두드려 패면서 단단해져라 부디 단단해져라
패면서 물 뿌리면서 이놈아 이놈아 울컥울컥 피 쏟을 것 같은 오후도
가버리고
덜컥
저물녘
김정석 시인 / 초승달
소아병동에서 마지막일 것 같은 숨을 내쉬는 아이
쪽창에 초승달이 떠서 같이 간다
갈수록 더 깊고 먼 밤일 뿐인데 안 가본 길이라 서럽기만 한 초저녁 여덟 시 오 분 누이의 눈썹 버려진 세면대에서 흐흐 웃고 있는 그림자
김정석 시인 / 하길이
사는 게 뭐라고 마누라 바람나서 떠나고 그런 한국이 싫다고 애들 다 외국으로 가버리고 기댈 데가 중졸 학력, 잔는 일 밖에 없어 낮에도 밤에도 용접기로
지지고 볶고 붙이고 밀고 자르고
그때 말야 자네 아파 이승에 누워있을 때 했던 말 생각나 형 사는 게 참 허망하네요 나는 못 해봤는데 형은 한 번 해보소
뭘?
바람이나 한 번 펴보소 나는 나 좋아하는 여자랑 딱 하룻밤만 자고 갔으면 소원이 없겠소
김정석 시인 / 만학晩學
팔 남매 낳아 기르다 보니 늘 부족했던 먹거리 어머니는 사는 게 나아졌어도 사과 한 알 당신 입에 못 넣다가 한쪽이 썩을 무렵에야 드셨습니다 사과 몇 박스는 살 돈 정도는 번다고 말해도 어머니는 웃기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야속했습니다
올해는 청개구리처럼 성한 과일 대신 떨이 사과 한 봉지를 들고 성묘를 갔습니다 산소 앞에 놓인 모난 과일은 뒹굴던 내 어릴 적 모습이었습니다 한입 가득 어머니를 베어 물었습니다 시고 달았습니다
김정석 시인 / 살구나무
땡땡 끝종은 운동장으로 아이들을 쏟아낸다 빈자리 곰살맞게 졸던 봄 햇살 깜짝 놀라 비낀다
나이 들어 품은 연심이 주책없다고 그래도 몰래 푸른 물 끌어당기던 교문 옆 늙은 살구나무 이때다 싶어 연홍의 꽃불 펑펑 터트린다 터진 꽃가루 타고 아이들 웃음 담을 넘어 도망간다 공부하기 싫어서 더 멀리 도망간다 햇살이 바퀴를 굴리며 숨가뿌게 쫓아간다 정년 일 년 남은 담임 선생님 낡은 교실 창에 기대어 햇살에 묻은 졸음 툭툭 털어내며 살구나무가 된 듯 괜스레 우쭐거린다 봄이 황톳빛 운동장 가득 환하게 웃고 있다
김정석 시인 / 수국
내일까지 기다리기는 어렵다고 한다 빚내서라도 입금하겠다고 한다
몸의 붉은 색 다 꺼내지 못하고 수국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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