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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석 시인 / 저물녘 당신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7.

김정석 시인 / 저물녘 당신

 

 

제철소에서

뻘겋게 타는 쇳덩이만 보면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다 가고

 

꽃이 피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당신이 떠났다는 소문이 찾아오고

뻘겋게 뻘겋게 타는 쇳덩이만 보면서

납작하게 두드려 패면서

단단해져라

부디 단단해져라

 

패면서

물 뿌리면서

이놈아

이놈아

울컥울컥 피 쏟을 것 같은 오후도

 

가버리고

 

덜컥

 

저물녘

 

 


 

 

김정석 시인 / 초승달

 

 

소아병동에서

마지막일 것 같은 숨을

내쉬는 아이

 

쪽창에 초승달이 떠서 같이 간다

 

갈수록 더 깊고 먼 밤일 뿐인데

안 가본 길이라

서럽기만 한

초저녁 여덟 시 오 분

누이의 눈썹 버려진

세면대에서

 흐흐 웃고 있는

그림자

 

 


 

 

김정석 시인 / 하길이

 

 

사는 게 뭐라고

마누라 바람나서 떠나고 그런 한국이 싫다고 애들 다

외국으로 가버리고 기댈 데가 중졸 학력, 잔는 일 밖에 없어

낮에도 밤에도

용접기로

 

지지고 볶고 붙이고 밀고 자르고

 

그때 말야 자네 아파 이승에 누워있을 때 했던 말 생각나

형 사는 게 참 허망하네요

나는 못 해봤는데

형은 한 번 해보소

 

뭘?

 

바람이나 한 번 펴보소

나는 나 좋아하는 여자랑 딱 하룻밤만 자고 갔으면

소원이 없겠소

 

 


 

 

김정석 시인 / 만학晩學

 

 

팔 남매 낳아 기르다 보니

늘 부족했던 먹거리

어머니는 사는 게 나아졌어도

사과 한 알 당신 입에 못 넣다가

한쪽이 썩을 무렵에야 드셨습니다

사과 몇 박스는 살 돈 정도는 번다고 말해도

어머니는 웃기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야속했습니다

 

올해는 청개구리처럼 성한 과일 대신

떨이 사과 한 봉지를 들고

성묘를 갔습니다

산소 앞에 놓인 모난 과일은

뒹굴던 내 어릴 적 모습이었습니다

한입 가득 어머니를 베어 물었습니다

시고 달았습니다

 

 


 

 

김정석 시인 / 살구나무

 

 

땡땡

끝종은

운동장으로 아이들을 쏟아낸다

빈자리 곰살맞게 졸던

봄 햇살 깜짝 놀라 비낀다

 

나이 들어 품은 연심이 주책없다고

그래도 몰래 푸른 물 끌어당기던

교문 옆 늙은 살구나무

이때다 싶어

연홍의 꽃불 펑펑 터트린다

터진 꽃가루 타고 아이들 웃음

담을 넘어 도망간다

공부하기 싫어서 더 멀리 도망간다

햇살이 바퀴를 굴리며 숨가뿌게 쫓아간다

정년 일 년 남은 담임 선생님

낡은 교실 창에 기대어

햇살에 묻은 졸음 툭툭 털어내며

살구나무가 된 듯 괜스레 우쭐거린다

봄이 황톳빛 운동장 가득 환하게 웃고 있다

 

 


 

 

김정석 시인 / 수국

 

 

내일까지 기다리기는 어렵다고 한다

빚내서라도 입금하겠다고 한다

 

몸의 붉은 색 다 꺼내지 못하고

수국이

 

졌다.

 

 


 

김정석 시인

전남 해남에서 출생. 2004년 《모던포엠》으로 등단. 시집으로 『별빛 체인점』 『내가 나를 노려보는 동안』이 있음. 광양제철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