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영효 시인 / 마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7.

정영효 시인 / 마방

 

 

마방은 설산이 녹을 즈음

겨우내 염장한 송이를 싣고 마을을 나선다

노을이 피멍처럼 산 위에 맺힐 때까지

벼랑의 허기를 뚫고 걷다,

먼지 씹은 말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땀구멍을 해열한다

저녁이 시작되는 곳에 천막을 치는 마방

풀벌레가 죽음을 예지한 울음으로 어둠을 물들이면

눈 속에 파묻힌 망령들이

다시는 마방이 되지 않기를 빌고

모닥불에 노래를 태운다

그때마다 그들은 내면에 갇힌 메아리를 노래에 섞어보지만

능선을 지나는 바람에나 잠시 인용될 뿐

사그라지는 불꽃을 재우는 연기의 경로와

협곡에 찍힌 구름의 지문으로 기후를 짐작해야 하는

마방에게 티베트의 고원은 신앙이다

마른 빵을 씹으며 적막과 동침하는 밤

담요 속에 웅크려 잠을 기다리듯 때로는

삶이 시간의 오지에서 홀로 체류해야 하는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말이 제 발자국 냄새를 맡고 킁킁거리는 아침이 와도

서로의 눈빛을 묵인한 채

새들도 우회하는 하늘 아내

마방은 짐을 싣고 길을 떠난다

 

 


 

 

정영효 시인 / 바람과의 여행

 

 

바람의 청자가 되어 오래 걸었다 그리고

 

어느 변방을 지나다 상인에게서 산 보이차

고원을 넘어오는 동안

보이차에는 바람의 무게가 더해진다는데 어쩌면

그건 무게가 아니라 바람이 놓고 간 음절이리라

 

경사를 오르며 읊는 경전처럼

상인들의 가쁜 입 속을 헹궜을 바람

차가운 저녁을 뚫는 말의 등을 밀며

제 살을 비벼 내는 소리가

차의 잎맥마다 살아 있다

 

떠나간 상인들을 생각하며

이역의 여관방에서 그 바람을 씹어본다

지금 그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날 때부터 말 울음소리를 배워야 하는 유년에 대해

길의 맥락을 앓던 밤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안개가 눕고 있는 고원 위에 입김이 짙어지면

달빛에 손을 비비며 추위를 견디겠지

밤사이 상인들의 젖은 몸을 뒤진 바람이

보이차의 음절에 더해질 텐데

잠이 오지 않아 꺼낸 편지지 앞

고향을 떠올리며 첫 문장을 쓰는 일이

그들의 표정을 이해하는 것처럼 어렵다

여행이란 잊었던 언어들을 더듬으며

내면의 이역을 찾는 시간인가

달빛이 낮은 조도로 윤색하는 방

나는 입 속에 맴돌던 바람을 풀어준다

 

 


 

정영효 시인

경남 남해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에 재학 中.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계속 열리는 믿음』(문학동네, 2015)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