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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영규 시인 / 부의(賻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8.

최영규 시인 / 부의(賻儀)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 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 움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라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 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 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니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 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 놓았다.

 

 


 

 

[한국시문학상 수상작]

최영규 시인 / 안데스 연작 6 카라반(Caravan)*

 

 

고통스러움마저 말리려 드는 태양, 볕을 피할 곳이라고는 없는 바카스(Rio de Las Vacas)계곡의 사막 같은 카라반(Caravan) 루트, 잔설을 걸친 능선 위로 너무나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하늘이 대원들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다. 어쩌다 작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바위라도 나타나면 그 밑으로 기어드는 대원들. 팔뚝 한 쪽씩을 그 그늘 밑으로 쭉 밀어 | 넣으면 전신을 달구던 화염 위로 한 바가지 냉수가 퍼부어지는 느낌이다. 막막하게 갇혀 있던 정신을 참시 되찾는다. 저 멀리 이틀쯤의 거리에 동빙하 계곡의 희다 못해 푸른 만 | 년설의 설벽이 어릴적 이발소에 걸려 있던 그림처럼 아른거린다.

 

* 카라반(caravan)이란 실제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기점인 베이스캠프까지 등반용 물자를 운반하면서 전진하는 것을 말한다.

 

 


 

최영규 시인

1957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천지 동인. 서사시 문학 동인. 시아카데미 동인. 한국시인협회 발전위원장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2000년 시집 아침시집. 문학아카데미. 현재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