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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인하 시인 / 부러지는 빛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8.

박인하 시인 / 부러지는 빛

 

 

나를 끝내 가질 수 없었던 당신을 생각하는 봄날

먼 데서 유랑하는 빛들이 한곳으로 모여와

저 꽃송이와 연두에 봄을 비비는 중이다

이곳엔 없는 공기인 듯 얼굴을 파묻고

당신을 마시면 날아 가버리던 냄새들

저 나무의 입술 연두의 껍질을 만진 자리에서

살살 터져 나온 냄새가 초록의 띠를 두른 풀밭

꽃그늘 아래서 당신을 천천히 흘려 보냈다

던 나라의 어느 골목에서 들었던

아코디언 소리

 

손을 꼭 잡고 빛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던 연인들

 

바람이 분다.

나무의 가지 끝 흔들리는 연분홍색으로

피어나는 저것들 빛을 다 들이마셨다

그 곁에서 조금씩 휘어지는 그들의 행간을

왔다 갔다 바람이 분다

알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 내게로 왔던 이여

봄을 비유하는 나의 문장은 언제나 당신

서로에게 다가가서 부러지던 빛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돋아나는 빛이 있었다

 

<시산맥 > 2021. 봄

 

 


 

 

박인하 시인 / 마스크팩

 

 

오늘 밤은 죽은 자의 얼굴로 시작해

몸에 천을 감듯 얼굴에 남은

한낮의 시간들을 덮는 거야 찡그려도 괜찮아

안 보이는 곳에서는

 

먼 나라 고대의 왕처럼 심심하게 누워 끝나지 않을 밤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 적막과

길게 이어지는 어둠은 상심하는 자들에게 필요하지

초콜릿색으로 물든 고독과

태양을 오래 바라본 눈은 밤을 위한 것

 

두꺼운 책처럼 잘 넘어가지 않는 당신은

가끔은 다정해서 홀려버리고 말아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마음들이

캄캄한 곳으로 발을 밀어 넣으면

나였다가 너였다가 엿같이 늘어나는 슬픔

잠시 얼굴을 가리고 나 아닌 듯 너 아닌 듯

매끄러운 피부가 되어가는 촉촉한 밤

하얗게 마른 얇은 낱장을 걷어내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이한 밤이야

 

 


 

 

박인하 시인 / 들어 봐요

 

 

 비는 저물어 가는 이곳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로수에 핀 봄꽃들의 하얀 이가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는 저녁 당신을 위해 일부러 찾아든 건 아니지만 아무튼요 당신이 무척 사랑했다던 마을 그린칭에 왔어요 눈에 보이는 건 비의 실루엣들 빗소리만 어둠과 함께 훌쩍여요 들리지 않아서 그 고요한 몸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비는 대지의 음악 밤새 저렇게 스며요

 

 비 내리고 밤 깊은 햇포도주의 마을 낡고 병든 나는 어디서 햇것을 품을 수 있을까요 들어 봐요, 빗소리들 밤새 후드득 이리로 던지는 봄의 알람 소리들 햇이파리 고개를 쑥쑥 밀어 올리며 어둠을 털어 내는 기척들 이 밤의 빗소리들 마르고 갈라진 영혼을 돌보며 촉촉해질까요 가지 끝에 매달린 초록의 음표들 반짝이며 아침이 오면 짐을 꾸려 이곳을 떠나요 불러도 늘 대답 없는 귀가 먼 당신

 

계간 《시인수첩》 2019년 겨울호

 

 


 

박인하 시인

1969년 광주에서 출생. 2018년 여름호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