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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아 시인 / 말문
을왕리 해변 불타는조개구이집. 불꽃 넘실거리는 불판 위에 침묵 한 바가지 쏟아 부었다. 그 침묵은 금방 터지고야 말 것 같은 내상, 푹 익은 비명을 숨기기에 나긋하고 촉촉한 입술을 가졌으나, 누군가에게는 끓는 물에 제 혀를 녹여낼지언정 절대 발설하고 싶지 않은 서러운 비경이 있는 법. 그렇지. 핏물이 배어나온 이후 한참을 더 불 지펴도 새파랗게 혀 하나 상하지 않을 묵묵부답의 경지가 있는 법이지. 그 사달의 전말 같은 붉은 마음을 해감하려다, 멀리서 휘청하는 밀물에 또 한 번 물렁 입천장이 들뜰 것이다. 침묵은 키조개의 관자처럼 잘 영근 말문. 해풍이 태연자약해질 때를 기다려 파도소리처럼 혀뿌리를 식힐 것이다.
불판이 식은 후에야 비로소 별빛이 말문을 쏟아내었다. 잔이 비어 가고 있었다.
김선아 시인 / 북두칠성
동트기 전에 파해 버린
맥도날드 뒷골목 인력시장
입맛만 다신
며칠째 헛물만 켠
시린 등
가만히 다독이는
어묵 한 국자
김선아 시인 / 가족
눈물 한 방울 —무서워 곁에 있던 눈물방울의 어깨에 기댄다. —이리 와 와락 와락 서로의 몸 깨뜨리니 바다가 되었다. 풍랑도, 빚쟁이도, 바퀴벌레도, 날벼락도 하나도 무서울 게 없는 넓고 깊은 바다가 되었다.
김선아 시인 / 얼룩이라는 무늬
검정색 일색의 몸이었으면 어땠을까.
얼룩무늬는 전력질주용 의상이야, 얼룩말이 새끼를 엄히 다그친다. 얼룩무늬 옷자락이 돌부리에 걸려도 무가내로 역주행하는 세렝게티에서
화려한 오방색 태생이었으면 어땠을까. 사자의 턱뼈는 번개처럼 파고들고, 귓속은 쇳소리로 먹먹해지고
흰 줄 피륙 검은 줄 피륙 따로 다 뜯겨나가 외톨이가 된 귓바퀴.
하이에나의 이빨에도 견딘 그 귓바퀴를 두루 무난한 은사로 꿰매주면 위로일까, 욕일까 별빛이 뜨겁게 번민하는 대초원에서
사막 그 너머의 안부가 궁금하여 절명의 순간에는 귀 더욱 총명해지는 것처럼 귓바퀴의 얼룩무늬 더욱 싱싱해지고, 흰 줄은 더 희어지고, 검은 줄은 더 검어진다지 않던가.
무덤덤한 흰색의 일생이었으면 어땠을까.
김선아 시인 / 그대 앞에서
물낯 할퀴지 않고 강물 건너는 바람을 보았는가. 그대는 내 생의 덫 덫 밟지 않고 생을 건너는 일 멀고 아득하여라. 바람 한 줄 스치자 달빛도 깊게 베어져 은빛 눈물이 빗발친다. 강물을 뒤흔든다. 뼛속을 후려치는 생애의 폭풍을 이쯤에서 버둥버둥 안아보고 싶었으나 칼금만 더욱 반짝이니 그저, 덫을 한 번 더 밟아 그대 앞에서 휘청거려야겠다.
시집 『얼룩이라는 무늬』 (2017. 1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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