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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기 시인 / 충북선
다음 생에는 충북선 기찻길 가까운 산골짜기에 볕바른 집을 마련해야지. 3.8일에 서는 제천 장날이면 조치원 오송 충주를 지나오는 기차를 타고 터키석 반지를 낀 고운 여자랑 제천 역전시장을 가야지. 무쇠솥에서 끓여 내는 국밥을 사 먹고 돌아다니다가 또 출출해지면 수수부꾸미를 사 먹어야지. 태백산맥을 넘어온 가자미를 살까 어떤 할미의 깐 도라지를 살까 기웃거리다가 꽃봉오리 맺힌 야래향 화분 하나 사고 귀가 쫑긋한 강아지도 한 마리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기차를 타야지. 손잡고 창 너머로 지는 저녁 해를 보다가 삼탄역이나 달천역쯤에 내려서 집으로 와야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산그늘로 숨어들어야지. 소쩍새 소리 아련한 밤이면 둘이 나란히 엎드려 시집을 읽을까.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들을까. 어쨌거나 다음 생에는 충북선 가까운 곳에 살아야지.
정용기 시인 / 춘분
특급열차로 사나흘쯤 걸리는 별에 가서 꽃보라 날리는 마을에 여장을 풀고 이웃집에서 담 넘어온 연분홍 살구꽃 그림자랑 노닥거리다가 꽃을 찾아온 벌과 나비랑 어울리다가 김영임이 불러주는 청춘가나 듣다가 꽃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로만 연명하다가
오는 봄에는 그렇게 한철 보내면서 행방이 묘연해질 것이니.
정용기 시인 / 태백선
기울어서는 안 된다고 미끄러져서는 안 된다고 가파른 비탈에 골똘히 서있던 늦가을 민둥산의 낙엽송들 떼를 지어 바늘잎을 노랗게 물들이면서 산기슭을 온통 뒤덮은 그 안간힘들 청량리행 무궁화호 차창에까지 기를 쓰며 따라오다가 예미 지나고 영월 지나는 즈음에서 오래 버텨오던 고단함을 내려놓네 내 어께로 기울여 설핏 잠이 들었네
몸이 만들어낸 무거운 그림자에 갇혀 허겁지겁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이쯤에서 그림자의 미늘을 빠져나와 생의 목차를 헝클어놓고 싶은 것이다 늦가을 저무는 산기슭으로 몸을 숨기는 길들의 뒤를 밟아보고 싶은 것이다 찰랑찰랑 밀려오는 어둠 저쪽으로 물수제비를 뜨고 싶은 것이다
정용기 시인 / 꽃씨
그대에게 가기 위해 던 항구에 정박 중이다 이승과 저승 어름에서 그대의 호출 기다리고 있다
접시꽃, 봄을 판 노잣돈으로 산 넘고 물 건너 그대의 마음자리에 뿌리내리고 한평생 견딜 것이다 나팔꽃, 전생을 가로질러 오는 아득한 빗소리 딛고 자주색 천둥을 그대에게 선물할 것이다 봉숭아, 밤새 등불 켜고 기다리다가 그대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대 마당에 봄볕 도달하기를 번개가 밀봉된 시간을 깨뜨리기를 주시하는 몸속에 용암이 들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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