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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재혁 시인 / 시(詩)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0.

김재혁 시인 / 시(詩)

-아내에게

 

 

내 삶의 강물 위에

누가 띄워 놓았나

이십여 년 전부터 떠 있는

종이배 하나

내 마음 흔들릴 때마다

멀미하는 가엾고 조그만

예쁜 돛단배 하나

그대

 

『아버지의 도장』 ,김재혁, 민음사, 2006년, 64쪽

 

 


 

 

김재혁 시인 / 초여름 풍경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 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엔

기다리는 풀 풀벌레도 없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김재혁 시인 / 햇살

 

 

아파트를 돌아 나오면서

나는 문득 생각한다

햇살이 따스하군

지난해 정동진 바닷가

모래를 덥혀 주던 저 햇살,

맑은 햇살이 자살 충동을 던진다고,

나는 어느 신문에선가 읽었다

뫼로소가 아랍인을 죽인 것도

저 빛나는 햇살 때문이라는데,

봄이 오는 아파트 도로를 걸어 나오면서

햇살의 유혹에 못 이겨

보도블록 밑에서 뭔가 몸부림치는지

발바닥이 간지럽다

그래, 저 햇살 속에는

삶과 죽음이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햇볕을 쬐는 저 여자의 머릿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아버지의 도장』 ,김재혁, 민음사, 2006년, 59쪽

 

 


 

김재혁(金在爀) 시인

1959년 충북 증평에서 출생. 1994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 『아버지의 도장』 『딴생각』이 있음. 현재 고려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