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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희 시인 / 조문객(問客)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0.

김정희 시인 / 조문객(問客)

 

 

장대비가 쏟아지자

공터 웅덩이 앞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순식간 빗소리와 나만 남았다

발길이 어떤 힘에 이끌린 듯 웅덩이로 흘러갔다

물을 베고 누운 개

엉겨 붙은 잠 한 덩어리가 둥둥

떠 있었다

生을 놓지 못하는 미련 줄인 듯

저승과 이승의 사잇문을 가로막은 사슬인 듯

놈의 모가지를 죄고 있는 붉은 노끈 자락이

서늘했다

 

누가

저 젖은 날개를 말리고 딱딱해진 말들을 녹이고

유서 같은 어둠을 벗겨 불어터진 넋을 어루만져 줄 것인가

 

시선을 거두어 돌아오는 길

노끈이 내 발목을 감으며 따라왔다

빗길이 온통 붉었다

그 위에

시구문(屍軀門)을 빠져 나온

한 송이

 

김정희 시집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문학의 전당)에서

 

 


 

김정희 시인

인천에서 출생. 2000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으로 『산으로 간 물고기』(문학의전당, 2004)와 『벚꽃핀 길을 너에게 주마』(문학의전당, 2007) 가 있음. 인천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빈터'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