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선희 시인 / 공터 정원사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0.

정선희 시인 / 공터 정원사

 

 

아파트로 이사 온 이후

환한 곳에 숨어 있는 공터 하나를 만났다

 

벌거벗은 지렁이에게 나뭇잎 한 장 덮어주는 기분으로

자주 공터를 찾았다

 

공터가 있어 아파트에 정을 붙일 수 있었다

 

환한 황무지 같은 곳

 

돌멩이들이 아무렇게나 뒹굴어도 좋은 곳

 

지난 홍수에 떠밀려온 나무가 제멋대로 서 있는 곳

 

화려한 곳에 원시적인 풍경이 숨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공터의 주민이 되었다

날마다 공터에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마음 속 풍경이 밖으로 삐져나온 곳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나를 위로한다

 

공터는 아파트 가격이 오를 때마다

단풍나무 한 그루를 프리미엄으로 받았다

 

스스로 보잘 것 없음으로 채워가는 환한

민들레 개망초 달맞이꽃 아카시아 자귀나무 오동나무

 

쳐다보는 일만으로도 나는 공터를 가꾸는 정원사가 되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1년 12월호 발표

 

 


 

정선희 시인

경남 진주에서 출생. 2012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푸른 빛이 걸어왔다』와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