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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현웅 시인 / 벼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0.

박현웅 시인 / 벼랑

 

 

이곳에 몇 번인가 배낭을 메고 와본 일 있네

또 몇 번은 그냥 지나치며 멀리서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네

오늘 나는 지나온 날들을 의심하며

벼랑 위에 가늘고 긴 유리막대처럼 혼자 서있네

의심은 그러나 체험을 착취하는 헛된 집착일 뿐

생의 모든 예정된 우연은 갑작스런 필연이 되어

수많은 실금을 그어대며

파열음으로 나를 관통해갔네

 

가장 무서운 방향에서 솟구쳐 오르는

수십 장의 바람이 뺨을 때린다

공중에는 젖은 세월이 힐끗거리며 몰려가고

나는 정적의 형틀에 단단히 묶여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이 죄스런 혈통의 예감은

세상 밖에서 흘러든 영혼의 오래된 발작

가슴 한쪽이 가파르게 깎이며 깊숙이

파묻혀있던 침묵의 기억들이 예리하게 일어선다

아, 기쁨을 가득 채운 공포여

이곳저곳 숨죽인 채 누워있던 어느 날의 화석이여

귀먹은 슬픔이 눈먼 기쁨을 핥고 있는

동족의 무늬들이여, 너희

내가 욕망의 채찍을 휘두르며 쾌락만을 쫓을 때

어디에서 나를 노려보았느냐

공포의 눈동자 만으로 빨려 들어가는

내 의식은 실신의 기척들로 가득하다

 

이곳에는 모두 늦은 것들뿐이다

내 희망은 이미 갓난아이 울음 속을 첨벙거리며

어른들의 헛된 기쁨으로 영원히 사라졌으니

여태껏 나는 절망을 키우며 살아왔다

고통에게서 버림받은 눈물이 여러 번

후회를 가장한 얼굴로 찾아와 삶을 속이려 들었지만

절망은 끝내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내 어깨가 힘없이 늘어질 때까지 집착의 배낭에

엎질러질 것들을 구겨 넣었다

벼랑 아래에 닿으면 아직도 주워 담을 내가 있을까

이 튼튼한 굶주림은 두려움에게 너무 가혹하다

 

 


 

 

박현웅 시인 / 인질극

 

 

가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내는 들고 온 자신의 문패를 거울을 향해 힘껏 던졌다

부위 하나하나가 칼날이 된 몸이 일제히

예리한 비명을 방바닥에 꽂았다

저 바짝 선 절규는 누구의 것인가

언제 한번이라도 이렇게 핏대를 돋우며

완강한 고독에 맞서본 적이 있었던가

사내의 얇아지는 숨소리가 공중에서 머뭇거린다

무엇이 여기까지 나를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희미하게 방을 더듬어본다

고백하자면 나는 평생 가구家具의 인질이었다

가구에 이끌려 이사를 다녔고

풀리지 않는 탯줄의 불안한 매듭으로 살았다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완전히 다른 삶이란 없다

사내의 몸이 딱딱한 덩어리로 굳어간다

녹슨 대문의 삐걱거리는 소리에도 뒤척이지 않는 절규들

이제 평생의 인질극은 끝났다

질긴 힘줄에서 풀려나며 사내가 챙긴 짐은

단단하게 묶은 자신의 몸이었다

마지막 이사가 될 것이다

 

- 2013 『두레문학』 제14호

 

 


 

박현웅(朴賢雄) 시인

196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2011년 《중앙신인문학상》에 詩 <사막>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