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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혁 시인 / 여수에서
당신을 당겨서 만든 감정이 아득할 때 당신이 아직이 아니고 다음이 아닐 때 나는 여수에 간다
여수에 가면 동백은 하나의 단위가 된다 “두 동백 정도는 보고 가야지 오동도 바람은 꼭 세 동백 같아” 사람들은 빨갛게 말한다
당신을 혼자 두고 와 어제는 여섯 동백을 걸었다
갓김치의 알싸한 맛에 당신의 슬픔을 베고 한 다섯 동백 잤으면
당신의 뒤를 바다에 새기며 향일암 일출을 기다린다 동백 동백 모여드는 눈동자들은 붉어서 좋다
오늘 아침에는 너무나 생생한 붉음의 윤곽 안에서 일곱 동백 울었다
―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파란, 2020)
정진혁 시인 /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
시간이 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오래 입어 해진 스웨터를 걸치고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6시 13분에 저녁을 달게 먹었다 어머니는 늘 시간을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이제 어머니는 시간의 먹잇감이 되었다 시간은 이미 귀를 먹어치웠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은 왼쪽 발목 관절을 먹는 시간의 입가에 어머니가 먹은 시간이 질질 흘러내렸다 시간은 사람을 먹어 작아지게 한다 기억을 먹어버리고 안경 너머 짓무른 눈에는 끈끈한 침을 발라놓았다 이 빠져 흉한 사기그릇처럼 군데군데 이빨마저 먹어치웠다 시간 앞에 먹이거리로 던져진 육신 어머니는 이제 손목에 시계를 차지 않았다 오늘도 어머니는 6시 13분에 저녁을 달게 먹었다 기다렸다는 듯 시간은 어머니 오른쪽 무릎 관절에 입을 대었다 먹히던 시간이 무서운 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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